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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12

홍순영 시인 / 새를 찾으러 갔다 홍순영 시인 / 새를 찾으러 갔다 새는 사이에 산다고 한다 너와 나의 늑골 사이에 너의 눈썹과 눈썹 사이에 책장 속, 나무들 사이에 외투 속에서 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지난 계절, 너의 늑골 사이에 들어앉은 새 풍경이 될 수 없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림 새의 부리로 쓴 편지는 심장 위에 떨군 점자처럼 불규칙하다 새를 찾아 저수지를 찾는 발걸음만큼 깃털 수는 늘어나고 외투를 벗자 우수수 떨어지는 말들 메마른 깃털 위에 모자를 씌워준다 모자 아래로 흐르는 검은 눈동자 나를 부른다 한때, 너와 내가 함께 바라본 새는 손과 손 사이, 아스라이 빚어내던 한 마리 새는 시간의 틈새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새는 멀어진 우리 사이에 아직도 산다고 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3월호 발표​ 홍순영 시인 인천에.. 2022. 8. 6.
박명보 시인 / 가마우지* 종족 외 3편 박명보 시인 / 가마우지* 종족 일생이 구강기인, 한 번도 무엇을 삼켜본 적 없는 커다란 아가리를 가진 종족, 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나요, 당신 본시 결핍이란 무언가를 끝까지 소유해보지 못한 상처의 음각이거나 공중에 뿌리 내리려는 맹목 같은 것이어서 힘주어 물고 있던 어금니가 시큰해질 무렵 알게 되죠, 느슨해지는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걸 모두가 떠난 밤에 위문편지처럼 줄 위에 걸리는 초승달 그녀의 꽃무늬 원피스는 끝내 가질 수 없었지만 가마우지 종족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지요, 당신 입안의 것 다 내주고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오늘 빨랫줄에는 빈 하늘만 펄럭이고 있네요 *가마우지: 중국의 계림지방에는 가마우지 낚싯법이 있는데 새의 긴 목 아랫부분을 끈으로 묶어, 잡은 물고기를 꺼내는 방법이다 **.. 2022. 8. 6.
김기찬 시인 / 화무십일홍 김기찬 시인 / 화무십일홍 햇볕과 매화만 가득한 채소밭에 누가 다녀갔네요. 허공에 노를 저어 나아간 흔적 또렷했어요. 그는 분명 무릉도원을 찾아 변산 바다를 막 건너왔을 것이지만, 구름을 타고 왔는지 바람을 타고 왔는지 통통배를 타고 왔는지는 묻지 않았어요. 수수하게 차려입은 그는 이생의 봄날이 처음인지라 약간의 지친 날개를 접었다 폈다 했을 겁니다. 그가 앉은 자리마다 꽃자리였으므로, 한없이 자유로운 그는 향기로운 꽃술에 입 맞추며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물씬 비린내 나는 풍문을 옮겼을 거예요. 진종일 자욱한 꽃향기에 젖어 꿈인지 생시인지 허둥지둥 헤집고 다니기에 바빴겠죠. 그는 무릉도원을 관리하는 상근직원입니다. 이제 막 터트린 천진한 꽃들에만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내죠. 동그랗게 말린 빨대를 빳빳하게.. 2022. 8. 6.
허혜정 시인 / 밤의 스탠드 외 1편 허혜정 시인 / 밤의 스탠드 이 아름다운 스탠드는 우리가 고른 것이다 작은 유리구슬을 당기기만 하면 부드러운 빛이 퍼진다 텅스텐 필라멘트처럼 위태롭게 깜빡이며 잠옷 위로 흐린 그늘을 만드는 빛 벽 위에 어슴프레 번져가는 그림자의 금 하나의 시공간에 엄연히 두 개의 삶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 하긴 어떻게 두 사람이 다 만족하는 사랑이 있는가 나날의 타협으로 쌓아올린 흐린 유리성 두 개의 상처를 이어 붙인 솔기처럼 하나의 행은 끝없이 이어진다 밤의 불빛 속으로 다가오는 피로한 얼굴 한 사람은 곯아떨어지고 한 사람은 깨어 있는 침대 이상한 슬픔이 몰려오고 갑자기 섬뜩하도록 차가운 정적 집이 텅 빌 때 느껴지는 그러한 정적 사랑. 누가 그 처음의 뜨거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서서히 식어가며 함께 누워 있는 욕조처럼.. 2022. 8. 6.
김림 시인 / 숲의 연가戀歌 외 1편 김림 시인 / 숲의 연가戀歌 맑은 시냇물처럼 흘러 그대에게 가고 싶다 뜨거운 햇살이 아예 두 팔 걷고 덤벼드는 어느 날, 연초록빛 그늘을 가득 안고 그대 발밑으로 흐르고 싶다 그대의 뽀얀 속살을 내밀히 적시며 내 마음도 잠시 희열에 젖고 그럴 때면 후두둑 놀란 숲길도 돌아앉아 저희끼리 한참을 소란스러울 텐데 그러건 말건 나는 정성스레 그대 발밑에 엎드리리 그대의 눈길이 지그시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 아, 나는 새처럼 노래 부르리 맑은 카나리아처럼 머리칼 나부끼며 구름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리 김림 시인 / 헛걸음 너를 보러 갔다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은 언제나 흐린 오후, 해를 안고 갔다가 빛을 내려놓고 어두운 길을 더듬어 오던 그 때, 마음 걸음 휘청거리고, 길은 아득했다. 비 오는 듯 뿌옇게 다가오는.. 2022. 8. 6.
[영화의 향기 with CaFF] (173) 폭포 [영화의 향기 with CaFF] (173) 폭포 아픔 속에서 두터워지는 모녀의 유대 가톨릭평화신문 2022.08.07 발행 [1673호] 인간관계의 상실감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 영화 ‘폭포’는 남편의 외도로 삶이 무너졌지만 자신의 상처를 돌아볼 새도 없이 가정과 사회에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게 살아온 주인공 핀웬(가정문 역)이 정신적으로 황폐해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린 작품이다. 핀웬은 외국계 회사에 다니는 커리어 우먼으로 타이페이의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남편과의 이혼 이후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인지 항상 긴장하고 여유가 없어 보인다. 딸 샤오징(왕정 역)은 고3 입시생으로 오로지 대학 진학이 인생 목표라서 그 외의 심지어 엄마에게조차 .. 2022. 8. 6.
조극래 시인 / 잘 자요 오렌지 조극래 시인 / 잘 자요 오렌지 영혼을 반환하러 왔다는 그녀는 무성한 열대야를 안고 있었다 바다에서 파도를 끄집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한다는 것이 얼마나 목덜미가 뻐근해져 오는 일인지 보석을 두른 그녀의 객기는 가벼워 보였다 그림자까지 침범한 눅눅한 습기를 바라보며 나는 싱싱한 오렌지 하나를 건넸다 아직도 절망은 리마 해변에 심취되어 있을까요 다리를 푹푹 옭아매는 개펄에도 숨소리는 꿈틀거립니다 저쪽 백사장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흥건하게 엎질렀다 눈꺼풀이 축 처진 밤의 이마에 폭죽을 올려놓았다 놀란 새들이 숲을 불 지르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나는 농담에 맞아 죽은 스물네 마리 자고새를 그려보다가 어쩌면 새들은 페루로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새들은 날아야만 길을 볼 수 있고 언제든지 선회할 수 있다.. 2022. 8. 6.
한정연 시인 / 아름다운 이야기 외 1편 한정연 시인 / 아름다운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각했다 초콜릿 중독자가 있다 강렬한 풍미를 느끼는 혀끝은 행복에 전율한 다 폭발적인 에너지를 내장한 초콜릿은 얼마든지 쌓여서 영원한 시간을 뚝 뚝 녹아 흐를 것 같다 주인공은 초콜릿을 먹다 죽는다 갑자기 죽는다고? 초콜릿에 혀를 대는 순간이었는지 기필코 목구 멍 너머로 넘긴 후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반드시 죽는다 왜냐고 묻는다면 하품이 나올 수 있다. 이유가 없어서 삶은 끔찍한 거니까 모른 척 잔인하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시작과 동시에 죽은 자의 꿈을 들여다본다 눈이 먼 맨발의 사람이 긴 옷자락을 끌며 눈밭을 걷고 있다 넝쿨줄기 채찍으로 자신의 몸뚱이를 내려치며 걸음 하나에 채찍 한 번, 세상은 후회로 눈부시다 그는 버려졌다 그가 그를 버렸.. 2022. 8. 6.
[신 김대건·최양업 전] (58) 다시 8개월간 조선 5도 돌며 [신 김대건·최양업 전] (58) 다시 8개월간 조선 5도 돌며 신자 있는 곳이라면 험준한 산골·외인 마을도 마다치 않고 달려가 가톨릭평화신문 2022.08.07 발행 [1673호] ▲ 최양업 신부는 조선 5도 127개 교우촌 신자 6000여 명을 담당해 사목했다. 그는 교우촌마다 꼬박 이틀을 머물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했고, 목숨을 걸고 성사를 기다리는 신자들이 있는 교우촌을 찾아다녔다. 사진은 최양업 신부가 사목한 충청도 도앙골 교우촌. 조선 교회의 착한 목자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거의 혼자 조선 교회를 도맡아 사목해야 했다. 이미 밝혔듯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건강이 거동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직후 1850년 1월부터 장마가 시작되기 전까지 6개월 .. 2022. 8. 6.
김진경 시인 / 코스모스 외 1편 김진경 시인 / 코스모스 코스모스 속엔 유랑 곡마단의 천막과 나팔 소리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까많게 높은 천장에서 아슬아슬 줄을 타는 곡마단의 소녀가 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얀 꽃송이 평그르르 맴을 돌며 떨어지는 물 맑은 우물이 있다 검은 물빛을 보며 나도 나팔 소리와 깃발 따라가는 떠돌이이고 싶었다 코스모스 속엔 하얗게 소름 마르는 길이 있다 시집 '슬픔의 힘」에서, 문학동네, 2004년. 김진경 시인 / 수묵으로 흐려져 가는 정물화처럼 다음 봄에는 부슬비라도 오시는 날 강변 집 마루에 앉아 눈처럼 날리는 벚꽃잎을 보며 그대가 막 걸러온 국화술을 마시고 싶군 나이 먹는 일이 뭉텅뭉텅 살덩어리를 떨어트리듯 욕망을 하나씩 버려가는 일이라 육탈이라도 하는 듯 몸은 나날이 소슬해지고 있으나 아직 떨치지 못한 머.. 2022. 8. 6.
주종환 시인 / 어떤 권태 외 2편 주종환 시인 / 어떤 권태 -잠시 쉬어가는 시 혹은 좆에 거는 기대 벌건 대낮, 이웃집 옥상 빨랫줄에 널려 있는 분홍색 팬티 한 장. 그 부재의 알몸을 시위라도 하듯 바람에 나불나불..... 어느 열이 많은 속살의 연장인 듯. 그 분홍빛 현기증에, 공기가 들어가는 고무 튜브처럼 슬그머니 팽창하는 아랫도리. 겨우 그 팬티 한 장을 보고 한 묘령의 여인의 추문을 캐내려 애쓰며 삼류 소설 한 편 써낼 수 있는 상상을 펼치는 이. 그것도 모자라, 그 팬티가 불결해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조목조목 상상하는 이. 이웃집, 시 쓴다는 총각. 인격 훼손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외설의 문학적 전통을 아직까지 고수하는 이. 그 총각 왈, 시는 인격도 품격도 아닙니다 시는 항상 시를 부인하는 모든 대상을 향해 결례를 범하는 것입니.. 2022. 8. 6.
김왕노 시인 / 메밀꽃 바람에 일면 김왕노 시인 / 메밀꽃 바람에 일면 달밤이 아니더라도 화창한 오후 메밀꽃 바람에 일면 막소금 같이 흩어진 메밀꽃이 바람에 일면 자잘한 송이송이 그리움도 일어 먼 이름 하나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미친 듯 불러도 좋지 않겠나. 장진주사 부르며 불콰한 얼굴로 일필휘지로 바보야 정말 너 보고 싶다 적으면 밀주 익는 냄새 묵향처럼 피어오를 테고 메밀꽃 바람에 일면 순풍에도 메밀꽃 바람에 일면 지겹도록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 수평선, 기어이 월경하듯 넘어가며 그간 소홀했던 이름, 나탸샤니 윤심덕, 순이, 전우로 비상도로 타다가 죽은 성삼이, 경호, 현석이, 김하사 꺼이꺼이 부르며 하얀 국화 송이송이 던지며 그들을 달래도 좋고 새들이 죽으러 가는 페루의 해안으로 로맹가리의 이야기로 밀항해도 좋고 메밀꽃 이는 계절이면 .. 2022.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