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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711

이승하 시인 / 인간 복제 외 1편 이승하 시인 / 인간 복제 한때는 꽃이 화들짝 피어나는 것이 신비였네 뜰 앞의 꽃들이 우수수 한꺼번에 지는 것이 경이로웠네 만월 두둥실 떠오르는 것이 별똥별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 꽃이 피면 우주가 열리고 꽃이 지면 우주가 닫힌다고 말한 시인은 이제 무엇을 노래해야 하나 크리스마스이브쯤 태어날 것 같은 '가'가 '나'를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복제 인간 그 친구에게 물어보고 싶네 - 『나무 앞에서의 기도』(케이엠, 2018) 이승하 시인 / 외길-혜초의 길 45 이 드넓은 데칸고원에 길은 오직 하나 이 적막한 파미르고원에 외길이 외롭게 나 있다 서역의 어느 하늘 아래서 끝나는 동녘의 어느 바다 앞에서 끝나는 길이 없을까 무슨 길이 길에서 내가 깨달은 것들 있다 길을 걸어야지 길동무도 만나고 길로 나서야지 길눈.. 2022. 8. 7.
​이문희 시인 /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이문희 시인 /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희고 느린 꿈을 꾸는 중예요 아마도 이 꿈은 때죽나무 꽃 위에 내릴 것 같아요 한낮이 붉게 차갑다가 밤엔 눈보라같이 뜨거워져요 눈동자에 여행자의 짐을 많이 실어서 실명할거라는데요 물푸레 그네에서 분홍 토끼가 일러주었죠 늙은 괘종시계는 거꾸로 서서 손뼉을 열두 번 쳤고요 난 누군가를 기다릴 때면 책 읽는 버릇이 있죠 오늘은 무지개를 싹둑 잘라 책날개에 붙였어요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요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라는 페이지를 멈춰요 심장을 켜면 음악이 흐르는 노란 시를 쓸 겁니다 언덕 위 벽돌집으로 와서 읽어줄래요? 변덕스런 난 마당가 맨드라미를 닮았대요 난쟁이 할머니가 알려 줬어요 두 가지 꽃이 피는 나무에서 내가 태어났는데 그러니까 내가 우울한 것도 검정양산.. 2022. 8. 7.
허민 시인 / 우주비행 허민 시인 / 우주비행 칫솔은 화장실 작은 유리 창틀 위 칫솔꽂이 대용으로 쓰는 컵 속에 몸을 기대어 제가 할 일이 없어지는 늦은 밤이면 캄캄한 철새들의 항로를 바라보며 우주의 먼 곳을 상상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어 라디오에서 흐르던 누리호 발사소식을 들으며 칫솔은 마치 기울어진 제 몸이 함께 일어서는 느낌이었지만 그것이 단지 아주 일시적인 행복이라는 걸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지만 알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 칫솔은 거울에 비친 이를 열심히 닦고 있던 이 사람에게 나는 과연 몇 번째 여행일까 궁금해졌어 그걸 나도, 이 사람도 기억할 수 있을까 그렇게 모든 걸 추억한다고 한들 이 캄캄한 밤 작은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밤을 비행하는 철새의 날갯짓을 흉내 낸다고 한들 그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어.. 2022. 8. 7.
김명림 시인 / 무명 시인 외 2편 김명림 시인 / 무명 시인 어깨 높이가 낮아지고 있는 남편 옆에서 불어터진 라면 한 가락도 안 되는 詩를 씁니다. 개도 냄새 한 번 맡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감나무 위 쑥떡새는 그것도 시가 되냐며 저희들 끼리 쑥떡 쑥-쑥떡 입방아 찧는,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남편이 노후를 걱정하며 애꿎은 담배 연기로 한숨을 삭이는 날엔 내 시는 더 외로워집니다. 늘 밝게 살아가라는 明林이란 이름, 향기 말간 시집 한 권 꽃 피울 수 있다면 내 노후는 키 작은 들꽃과 새들이 노래하는 밝은숲 속에서 무명시인으로 살아가도 좋을 듯합니다. 김명림 시인 / 시골버스 뱀처럼 꾸불텅꾸불텅 기어가듯 달려가는 시골버스 장날도 아닌데 읍내 국밥집에서 반주라도 한 잔 걸치셨나 불콰하게 취기 오른 어르신, 곰방대 장단 맞춰 노래 부르시네.. 2022. 8. 7.
양균원 시인 / 달빛 흉터 외 1편 양균원 시인 / 달빛 흉터 바닷가 찬바람은 깨진 거울을 생각나게 하지 물이랑 위로 튀어 오르는 달빛 수천 조각이 내 눈구멍을 파고 있어 달무리에 싸인 저것 소주 한 병 동무하다 바위틈에 내던진 성게 껍질 뒤집힌 속인 듯 방파제 때리다 저 먼저 박살난 파도 낙하 직후인 듯 바닷가의 초봄 추위 해피엔딩은 그다음에 아무것도 오지 않는 것이지 이제 웬만큼 멍들었고 그다지 심란하지 않으므로 달빛 주술사에게 조용히 건배 아니, 저것은 첫아이 볼에 난 화상의 흔적, 돌이킬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것, 그뿐일 것 달이 찰수록 짙게 돋아나는 흉터 빛에 난 상처가 자라고 있어 양균원 시인 / 괘종시계 시간이란 눈앞에 왔다 갔다 대청마루 비질하는 대숲 바람에 쉴 새 없이 좌우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떠나는 자의 심장박동 속.. 2022. 8. 7.
선안영 시인 / 얼룩무늬 하루 외 1편 선안영 시인 / 얼룩무늬 하루 1 맨살의 두 다리를 스타킹에 넣는 순간 그물망에 갇힌 듯 파닥이며 저항한다 포획된 먹잇감처럼 불행이 감전되는 2 매일 매일 출발할 뿐 도착한 적 없으니 혀를 깨문 시간은 정글의 피 맛이 나 날쌔게 잭나이프 칼날처럼 나를 구겨 넣는 날 3 찔레 넝쿨 가시 속 비상 같은 흰 꽃피어 우거진 질문들을 받아쓰는 물웅덩이 패어진 길의 등짝에 또 얼룩이 꽃핀다 -선경해시문학회 창간호, 선안영 시인 / 천일홍 분홍 한 사람의 그림자에 벚꽃이 피어난다 꽃 속에 눈사람이 천천히 녹고 있다 심장을 허물고 있다 꽉 쥔 손을 펴고 있다 흰 눈꽃 녹아내린 물방울 소리 번진다 흘러왔던 물이 잠시 한 바퀴를 맴돌다 고요히 빠져 나간다 적멸을 향해 간다 타다가 만 연분홍, 타다 남은 흰 손가락 그 맹세.. 2022. 8.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