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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810

이미영 시인 / 편의점 라이프 이미영 시인 / 편의점 라이프 3분 30초만 기다려줄래요 그러면 편의점 구석진 코너에서도 충분히 뜨거워질 수 있어요 폭설이 내리는 막막한 날에도 아름답게 익어갈 수 있다니까요 허기진 추위를 달래는 동그란 은박 뚜껑의 힘 앙다문 입술과 컵라면 입구를 동시에 열면 일회용 면도기를 사다 달라는 집에서 기다리는 애인쯤 잊을 수 있어요 로맨틱 드라마와 대설주의보 사이 짧은 대출 광고가 지나가는 저녁 한겨울에 피는 붉은 포인세티아가 판매대 잡지 표지를 장식하고 있네요 저 타오르는 사랑처럼 짝을 맞춘 이 나무젓가락처럼 나도 애인과 함께 환한 봄을 향해 행진할 수 있을까요 올라버린 월세를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요 후루룩! 씹지도 않은 1인분이 캐럴을 따라 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요 편리성을 전전하며 살아왔어도 도무지.. 2022. 8. 8.
이만영 시인 / 이미지 한 컷 이만영 시인 / 이미지 한 컷 빌려도 될까요 믿음, 물음, 묻음, 묵음 그리고 무음의 이미지들 빙빙 돌다가 멈춰선 슬라이드 박스 속에 출렁이는 파도, 담배를 비벼끄고 멋쩍게 웃는 젊은이들, 뜀박질하는 어린애들, 아직은 멀쩡하지만 지팡이에 기대려는 사람들 모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액자 속의 오늘, 저녁의 문을 미리 닫으려는 표정들 좀 더 착해지려고 이상하지요 아무리 노를 잘 저어도 바다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논리로 물이 들어오는 배에서 손금을 따라가보면 머리칼 풀어헤친 물풀들의 율동, 물방울은 물방울끼리 물풀은 물풀들끼리 몸을 부벼 함께 뭉쳐질 운명인 것만 같습니다만, 흔들림의 투명 속에 햇빛이 왈칵 쏟아져 꺾이고 파도 속에 난해한 추상화 풍경이 나오고 어떤 장면은 탄생을 축하하는 축포처럼 온몸을 끌어당겨.. 2022. 8. 8.
홍관희 시인 / 홀로 무엇을 하리외 1편 홍관희 시인 / 홀로 무엇을 하리 이 세상에 저 홀로 자랑스러운 거 무어 있으리 이 세상에 저 홀로 반짝이는 거 무어 있으리 흔들리는 풀잎 하나 저 홀로 움직이는 게 아니고 서있는 돌멩이 하나 저 홀로 서있는 게 아니다 멀리 있는 그대여 행여 그대 홀로 이 세상에 서있다고 생각하거든 행여 그대 홀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우리 함께 어린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자 밥그릇 속의 밥알 하나 저 홀로 우리의 양식이 될 수 없고 사랑하는 대상도 없이 저 홀로 아름다운 사람 있을 수 없듯 그대의 꿈이 뿌리 뻗은 이 세상에 저 홀로 반짝이며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있을 수 없나니. 홍관희 시인 /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의 거리 사람과 사람 사이 강이 흐른다 그대와 나 사이 그리운 꽃 한 .. 2022. 8. 8.
한인숙 시인 / 바람의 경전외 1편 한인숙 시인 / 바람의 경전 숲에서 바람의 길을 찾는다 그 안쪽으로 들어서자 바람에 찍힌 새의 발자국과 잎들이 내는 휘파람으로 온통, 수런하다 나무가 물길을 여는 것도 태양의 그림자가 숲의 바깥으로 향하는 것도 나무에 난 푸른 상처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숲이 길을 내기 위해 오랜 시간 직립을 꿈꾸었듯 바람도 직립을 향해 숲으로 든 것일까 직립이란 때론 위험한 거처다 허공의 고요를 넘겨다보며 삐걱거리기도 하고 때론 푸른 무게를 읽어 제 안의 힘을 바람에 맡길 지혜도 필요하다 그러나 바람은 복면을 쓴 채 숲을 공략할 것이고 간혹 상한 손길이 직립의 물길을 가로채기도 하겠지만 휴식을 반납한 숲은 지금 성업 중이다 풀꽃들의 경전이 태양인 것처럼 나무의 경전이 바람임을 숲에 이르러 읽는다 한인숙 시인 / 풀 9.. 2022. 8. 8.
오세경 시인 / 히아신스외 1편 오세경 시인 / 히아신스 여자가 꽃 대궁 속으로 들어간다 한 생을 화살표에 내맡긴다 화관을 머리에 이고 떠났던 자리로 되돌아올 것이다 물끄러미 여자가 사라진 입구를 들여다본다 한나절이 지났다 여자는, 화살표를 지우고 마음의 둥근 길을 따라갔으리라 제자리가 아닌 꽃밭너머 아득한 평원을 꿈꾸었으리라 길 잃은 자의 상처를 화관처럼 품었으리라 불끈 꽃대를 움켜쥔다 히아신스, 여자를 뱉어낸다 열두 폭 치마를 펼친다 향기없는여자색깔없는여자무늬없는여자 표정없는여자얼룩없는여자그늘없는여자 열 두 폭 치마로도 감출 수 없는 울음들이 핏빛 울음들이 터져 나온다 향기가색깔이무늬가표정이얼룩이그늘이 설익은 한 생을 물들이며 깊어간다 오세경 시인 / 캐스터네츠 “하지만 캐스터네츠가 어디 있어야죠?” 중얼거리던 집시여자는 재빨리 노.. 2022. 8. 8.
전영주 시인 / 능소화외 1편 전영주 시인 / 능소화 가녀린 몸 길게 빼어 어느 집 담장 밖으로 뒤꿈치 높이 들고 임의 발걸음 들으려 귀 활짝 열어 기다리길 수백 년 독을 품어 만지는 이의 눈을 멀게 하는 여인의 몸부림은 뜨건 뙤약볕 시들지 않고 송이채 떨어져 아름다운 자태 뽐내어본다 다시 찾치 않는 무심한 낭군 혹여 오실까 붉은 핏 빛 같은 기다림은 긴 상념 속 사랑의 매듭으로 더 멀리 더 높은 곳 휘어 감고 유혹한다 전영주 시인 / 붉은닭을 팔다 사내가 앞치마를 두르다. 통도마 위에 냉동닭이 놓이다 단숨에 내려찍는 칼에 여섯 토막으로 아침이 갈라지다 사내의 아내가 다시 하혈을 시작하다. 뭉클뭉클 뜨거운 기름이 끓어오르다. 양념치킨집의 영업이 시작되다. 기름의 온도가 상승하다. 하혈하는 방의 온도가 상승하다. 사내가 아내를 벗겨 냉.. 2022. 8. 8.
손상호 시인 / 이별연습 2. 외 1편 손상호 시인 / 이별연습 2. 내 배꼽에는 열쇠가게 스티커가 겹겹이 붙어 있고 배꼽아래에는 사우나탕 스티커가 더덕더덕 붙어 있지요 몸이 무거워진 나는 신호등이 짧은 축협 네거리를 건너가지 못합니다 힘들면 서울로 오라시는 김형, 5월인데도 동강(江)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서울에 갔다가 욕본 여자는 오늘도 소주를 병 채로 마십니다. 여자의 등 뒤에서 붉은 해가 솟았지만 여자는 여전히 안개를 껴안고 놔주지 않습니다 시든 물매화처럼 물때 짙은 강을 목 놓아 부르다가도 금세 안개를 쫒아 다닙니다 이렇게 풍요로운 날, 마른 강에 빠진 여자를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물비린내가 싫어 허리에 차고 있던 강을 내다버렸겠지요 서울행 비둘기호를 타고 붉은 나무들의 숲으로 떠났겠지요. 손상호 시인 / 매일 흔들리는 부호, .. 2022. 8. 8.
박옥화 시인 / 누군가의 가슴속에 외 2편 박옥화 시인 / 누군가의 가슴속에 태어날 때는 빈손이었지만 떠날 땐 빈손이 아닌 누군가의 가슴속에 한 송이 꽃은 아니어도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작은 별로 기억 되고 싶다 보고파 그리워지는 사랑으로 기억 되고 싶다 먼 훗날 누군가의 가슴속에 그리운 이름 하나로 남겨지길 소망하면서.... 박옥화 시인 / 우리 서로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어요 차디찬 겨울 칼바람이 불어도 외롭지 않고 춥지 않습니다 늘 지켜주고 보듬어주는 그대의 사랑이 있기에 방울방울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는 내리자마자 녹아 빗물이 되지만 그대는 녹을 줄 모르고 포근하게 감싸줍니다 이 겨울 마음만이라도 우리 서로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어요 박옥화 시인 / 가을이면 더 그리워지는 친구 선선한 바람을 안고 가을을 가득 담으러 길을 나선다 길에서.. 2022. 8. 8.
이선락 시인 / 숲, 플래시몹 이선락 시인 / 숲, 플래시몹 # 장면 1 사람 같은 것들, 무작위로 둘러서있다 가장자리, 약간 경사진 너덧 평의 공중 햇살 가. 수화를 던진다 검은 옷에 하얀 꽃 듬성한, 여자 막 왼손 위에 오른손을 갖다 댄다 나. 빨간 재킷 빨간 모자, 양손을 아랫도리 쪽에 포갠다 눈을 15도쯤 들어, 무슨 소리가 들린 듯 구름 쪽을 바라본다 다. ‘나’의 눈빛이 부산스러워서일까 양손으로 입을 가린다 누군가 제 입속말을 눈치 챌까 두려워한다 눈빛을 아랫배 쪽으로 가져간다 라. 표정 없이 ‘나’의 반대쪽을 본다 수직, 그늘이 바닥까지 걸쳐있다 마. 스카프를 길게 늘어뜨린 채 손거울을 보는 듯, 오른손 들어 얼굴을 살짝 가린다 눈은 아래쪽으로 향했으나 눈빛이 거울 속에 머문다 사. 수화를 보지 못한 듯, 눈을 주머니에 .. 2022. 8. 8.
김재언 시인 / 진담 김재언 시인 / 진담 진돗개 악다구니에 걸려든 허벅지 믿은 도끼는 나동그라지고 번개가 천둥의 뒤통수를 관통한다 이빨 박힌 외마디에 사방으로 튀는 불똥이 맨땅을 쳐올리고 버둥대는 소리 밖의 소리까지 패대기쳐진, 아주 가벼운 진담 사이로 돌부리가 디굴디굴 내빼는 동안 맹독성 타투는 피자두 자국으로 번진다 우리 딸은 물지 않는데…… ​물고 흔드는 이유 모를 고집을 단연코 떼어내지 못하는, 줄임말을 놓친 개엄마는 짖던 입에 지퍼를 채운다 피 맛을 본 입꼬리에 현기증을 일으킨 낮달이 혼절하고 동백은 비린 제 모가지를 툭, 꺾는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3월호 발표​ 김재언 시인 2021년 계간 《애지》 겨울호를 통해 등단. 2022. 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