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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910

박현솔 시인 / 계절을 건너가는 것 박현솔 시인 / 계절을 건너가는 것 눈덩이를 굴리고 있는 나를 보는 너의 두 눈 내가 발 디디고 있는 이곳이 바로 야생이구나 빗소리가 사방에서 조여 오면 금세 비에 갇히고 눈 오는 소리가 멀리 피어날 때 눈에 갇히고 바람이 꼬리를 잘라내고 사라지면 바람에 갇히고 햇빛 퍼지는 소리가 느긋하면 햇빛에 갇히고 우박 소리가 심장에서 들릴 대 우박에 갇히고 창을 칭칭 동여맨 저녁 때문에 안개에 갇히고 갇히지 않고서는 다른 방도가 없는 이치 갇히다 보면 자유로워지기도 하는 순리 세상의 도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우치는 날들 눈사람의 두 눈과 코와 입이 슬쩍 들러붙는 날들 (『열린시학』 2021년 가을호) 박현솔 시인 1971년 제주에서 출생.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아주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19.. 2022. 8. 9.
박진형 시인 / 소리 외 2편 박진형 시인 / 소리 소리를 얻기 위해 소리를 버린다 흩어진 목소리들이 수런대는 카페에서 어제까지 즐겨 듣던 음악이 오늘은 불안한 배경이 되어 바닥에 깔린다 무심히 에도는 음표는 거북한 선율이 되어 커피가 놓인 내 자리를 감돈다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날선 소음은 달팽이관을 서투르게 간질이는 독벌레 바람소리, 파도소리, 종소리가 내 안에서 거칠어질 때 이어폰을 꺼내 귓구멍에 밀어 넣는다 밀봉은 하나의 소리는 닫고 다른 하나는 피어나게 하는 환상의 작업 나는 짧은 들숨을 참으며 침묵의 볼륨을 조금씩 높인다 날카롭고 단단한 주파수가 귀를 두들일 때마다 어긋난 소릿결은 귓불을 파고든다 이어폰은 소리를 열고 닫는 문 세상으로부터 귀를 닫으면 보이지 않는 소리의 이면이 보인다 모든 소리를 밖에 두어야 닫힌 귀뿌리에.. 2022. 8. 9.
김새하 시인 / 망각 처방전 외 4편 김새하 시인 / 망각 처방전 숲 너머 벼랑이 고고한 척 똬리를 틀었다 숲을 지나는 동안 똬리 풀린 벼랑은 사라지고 길 생기길 바란다고 과연 벼랑이 길을 향해 양보를 내놓을까 우리는 기도한다 돌 틈 약수 바가지로 바닥 긁듯 애타는 한 방울에 그리움 담아 기도한다 시간이 바닥나도록 그리워하면 어쩌면 하늘이 돌려줄지도 몰라 끝에 서면 마주할지도 모르는 일 누군가 붙여놓은 크기 다른 이름을 가진 하루하루 시간이라는 하나가 여러 개의 톱니 물려 돈다 잊고 살아도 흐르는 시간이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모자라는 그리움 눈감아 주는 너그러운 시간 속 많은 것을 용서받고 낡은 톱니는 출렁다리를 놓고 김새하 시인 / 시간 내놓은 적 없는 시간이 거리에 누워있다 분리된 것을 의식하지 못한 시간의 주인이 이제야 내놔진 시간을 .. 2022. 8. 9.
여국현 시인 / 1984년, 빵가게 외 1편 여국현 시인 / 1984년, 빵가게 ‘1984년부터 주인이 직접 만든 빵가게’가 문을 닫았다 자정이 가까울 무렵 물에 젖은 깻잎 모양 흐느적거리며 귀가할 때 은행 옆 은행나무 맞은편 옛체로 쓰인 하얀 간판 아래 밝은 조명이 환한 진열장 뒤에서 가게를 지키던 중년의 부부가 빵가게 옆을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금전출납기 통을 열었다 닫거나 가게 벽면에 달린 태양 장식 시계를 보거나 진열장 속 팔리지 않은 가지런한 빵들을 바라보고 있던. 부산어묵 아주머니는 ‘오래 버텼지’ 했다 슈퍼마켓의 사내도 ‘오래 버텼지’ 했다 대형 체인 바케트가 대로변을 점령한 뒤로 몇 개의 작은 빵집이 들어섰다 사라지고 하던 곳 어느 일요일 늦은 오후 주인 남자가 빵 봉지를 내밀며 멋쩍게 말했다 “오늘 두 번째 손님이세요.. 2022. 8. 9.
이규리 시인 / 구름의 말을 빌리면 이규리 시인 / 구름의 말을 빌리면 그 자리에서 왜 나는 도망치고 싶었는지 그런데 왜 도망칠 수 없었는지 사실 알고 있었어요 어이없게도 화를 내는 사람은 강한 사람일까 허약한 사람일까 따위를 점치는 것으로 견디고 있었어요 이런 거 다 구름 이야기죠 구름이 되려다 못된 허무의 이야기죠 별자리를 짚어 가다보면 아주 먼 곳을 갈 수 있을 것 같아 갔다 돌아오는 걸 잊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구름의 말을 빌리면 한결같다는 건 얼마나 많은 함정을 지닌 것인가 맞는 말이에요 젠장 나는 사랑한 적이 없어 이해해요 그렇죠 구름은 정형이 없어요 꽃과 열매를 함께 달고 있는 나무가 있었으니까요 (『서정시학』 2021년 가을호) 이규리 시인 1955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현.. 2022. 8. 9.
신수옥 시인 / 그렇게 어른이 되었네 신수옥 시인 / 그렇게 어른이 되었네 우린 둘 다 번호키 소유자 열쇠가 따로 없고 열고 싶어도 비밀번호를 모르네 가깝고도 멀어 곁에 있어도 서로 다른 별을 바라보네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숙제에 몰두하네 들여다볼수록 미궁에 빠져 허우적대네 우화를 꿈꾸지만 갈아입을 어른이 준비 안 된 나이 풀리지 않는 인수분해 괄호 하나에 들어 있는 두 개의 기호처럼 끝까지 같이 있어야 정답에 도달하네 숫자 맞추기에 안간힘을 쏟는 동안 너는 오래전에 나를 풀었으면서 모르는 척 밖을 서성였네 정답이 적힌 쪽지를 건네주고 웃으며 가버린 너 슬픈 색으로 물들인 어른의 옷 받아든 손이 아프도록 시리네 (『문학나무』 20201년 가을호) 신수옥 시인 이화여대 화학과 졸업. 同 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이수. 이화.. 2022. 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