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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512

박소진 시인 / 정동길 외 2편 박소진 시인 / 정동길 첫서리가 사라졌다 눈빛마다 붉은 거품을 토하고 그녀의 발자국을 마주보고 굴렀다 내 발자국도 따라 울었다 초록 돌멩이끼리 짓이겨 껴안고 그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겨났다 새끼손가락 하나 들어갈 것 같은 세모난 고리 같다 거기에 내 심장을 껴 맞춰본다 걷는 외로움에 길 틈틈이 핏빛 그리움을 묻어 놨는데 가을이구나, 그녀의 낙엽이 하강하고 문득 끼워 넣은 심장이 잘 있나 궁금해져 다시 담들의 돌멩이로 갔다 퉁퉁 불어터진 고깃덩어리가 입이 달려 정신없이 뜀박질한다 어느새 차가운 낙엽 위로 하얀 발자국 박소진 시인 / 바람을 부르는 소리 허공의 승무가 시작된다 바람결이 그네를 띄우면 구경 온 여인네 치마폭에 아들을 잃은 어미의 노래가 스민다 현을 뜯고 울음을 토하라 사냥하라 노루의 잘려진 발톱.. 2022. 8. 15.
김삼환 시인 / 책갈피를 꽂아 놓고 외 1편 김삼환 시인 / 책갈피를 꽂아 놓고 책갈피를 꽂아 놓고 일어서려 하는데 방금 본 구절 하나 무릎 아래 툭! 떨어져 하늘로 사라진 시간을 되새겨 놓고 간다 뜰 귀퉁이 자목련이 반쯤 벌다 멈춘 시간 바람도 정원에서 한 바퀴 돌고 간 뒤 그렇게 문장 한 줄이 오롯하게 생각났다 봄 산의 뻐꾸기가 드문드문 던지는 소리에 반나절을 졸고 있는 고양이가 흠칫할 때 그리운 추억은 살아 홍모란이 벌고 있다 김삼환 시인 / 바루鄙陋하다 빨랫줄에 누더기 옷 바람이 훑고 가고 냄새나는 구두 한 짝 마른 버짐 피어나니 등허리 가려운 자리 닿는 손이 비루하다 솜털이 날아가는 먼지 기둥 뒤로 숨어 눈 흘기며 손짓하는 부끄러운 시간 앞에 한 생이 너덜거리는 문장 또한 비루하다 2022. 제16호 김삼환(金三煥) 시인 1958년 강진에.. 2022. 8. 15.
김봉식 시인 / 직유로 부처 찾기 외 1편 김봉식 시인 / 직유로 부처 찾기 낚시터엔 선승이 많네 부처처럼 처자식 버려두고 저수지를 벽 삼아 동안거에 드시네 깨달음은 담배 몇 갑째 분의 명상에도 말뚝 찌처럼 꿈쩍 않고, 치어稚魚 같은 번뇌들만 화두를 슬쩍슬쩍 건드릴 뿐이네 낚시바늘에 꿰인 지렁이를 부처께 공양하네 선승들, 참선의 시간 지날수록 물음표처럼 꼬부라지네 물음표가 물음표를 캄캄한 마음바닥에 던져 놓고 물음을 기다리네 문득! 법열인 듯 찌가 솟구치네 수면 위에 큰 느낌표 하나 찍네 황급한 챔질에 끌려나온 월척같이 눈부신 부처님, 낚시바늘 끊고 유유히 도망가시네 김봉식 시인 / 기수지역 초식성의 강물과 육식성의 바닷물이 만나는 경계가 있다 강물을 거슬러 내려온 어린 연어가 제 몸 속 염분의 농도를 가까스로 견디듯, 치사량의 소금이 사람의 지.. 2022. 8. 15.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좋지 않은 기억들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 좋지 않은 기억들 가톨릭신문 2022-08-14 [제3306호, 15면] 부정적 기억에 매달리는 이유는 털어버릴 마음의 힘 약하기 때문 불편한 기억 내면에서 떨치도록 소리치는 방법 효과 볼 수 있어 사람들은 살면서 많은 경험을 하고 그것들을 기억의 창고 속에 보관한 채로 살아갑니다. 기억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물밑에 가라앉은 물건처럼 무의식 안에 가라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그 속에서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만져보고 느껴보곤 합니다. 소위 추억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삶이 각박하다고 느껴질 때면 기억의 창고 속에서 그리운 추억들을 꺼내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로를 받습니다. 문제는 좋지 않은 기억을 많이 가지고 사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늘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좋지.. 2022. 8. 15.
정바름 시인 / 산에서 보았다 외 1편 정바름 시인 / 산에서 보았다 봄에는 꽃이 보였고 여름엔 숲이 보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가을이 흔들리더니 겨울에야 비로소 산이 보였다 산길을 걷고 있는 내가 보였다 정바름 시인 / 살은 척 꿈속에서 죽은 친구를 만났다 그간 죽은 척했노라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노라고 했다 꿈을 깨고서도 한참을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난감한 일을 만나면 나도 그렇게 슬쩍 세상을 비켜갔다 안 그런 척 또는 그런 척 아무도 모를 거라 자위하며 철저히 주변을 속여왔다 나조차 내게 속곤 했다 심지어 나는 오랜 세월을 살은 척하고 있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정바름 시인 1964년 충북 영동에서 출생. 1993년 《한국시》로 등단. 시집으로 『사랑은 어둠보다 깊다』 『빛비』가 있음. 의 이사장을 역임했고 각종 공연의 해설을 맡고 있다.. 2022. 8. 15.
육근상 시인 / 여우 외 2편 육근상 시인 / 여우 정월은 여우 출몰 잦은 달이라서 깊게 가라앉아 있다 저녁 참지 못한 대숲이 꼬리 흔들며 언덕 넘어가자 컹컹 개 짖는 소리 담장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런 날 새벽에는 여우가 마당 한 바퀴 돌고 털갈이하듯 몸 털어 장독대 모여들기 시작하지 배가 나와 걱정인 장독은 웅기종기 숨만 쉬고 있었을지도 몰라 여우는 골똘하게 새벽에 기다린다 고욤나무 가지에도 신발 가지런한 댓돌에도 고리짝 두 개 서 있는 대청까지 들어와 바람을 토굴처럼 열어 세상 엿보고 있다 나는 칼바람 몰아치는 정월이면 문풍지 우는 소리 견디지 못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럴 때마다 화진포에서 왔다는 노파가 간자미회 버무려 주는 집에서 며칠이고 머물다 돌아오곤 하였다 소나무가 한쪽 팔 잃고 먼 산을 바라보는 것은 밤새 여우가 길 내어.. 2022.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