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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712

김성춘 시인 / 길 위의 피아노 - 은유에게* 외 4편 김성춘 시인 / 길 위의 피아노 - 은유에게* 골짝 물소리가 희다 아이가 아침의 피아노를 치고 있다 연둣빛 고기때들, 물살에 따라 휘어진다 별은 뜨겁고 노래는 길다 갓 낳은 달걀 같은 하루가 내 손을 잡는다 노래가 있어 고맙다 너가 있어 고맙다 노래는 생의 기쁨, 생의 고통 별은 어둠이 있어야 빛나는 법 짙은 눈썹의 왜가리 한 마리 먼 숲을 사무치게 바라보는 아침 아이가 아침의 피아노를 치고 있다. * 2008년 생으로 올해 13세, 필자의 손녀 현재 독일 퀼른 음악대학 영재학과 피아노 재학 중 김성춘 시인 / 물소리 천사-그의 全身은 물이었다 물소리 하나 이승을 떠났다 물소리가 새 한 마리와 잘 놀다 떠났다 푸르고 싱싱한 물소리 불일암(佛日庵)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하도 입구에도 버스 정류장 근처에도.. 2022. 8. 17.
윤효 시인 / 생업 외 1편 윤효 시인 / 생업 종로6가 횡단보도 원단두루마리를 가득 실은 오토바이들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신호총이 울렸다. 장애물을 요리조리 헤치며 동대문시장 안 저마다의 결승선을 향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좀처럼 등위를 매길 수 없었다. 모두 1등이었다. 윤효 시인 / 완생 (完生) 그렇게 좋아하시던 홍시를 떠 넣어 드려도 게간장을 떠 넣어 드려도 가만히 고개 가로 저으실 뿐, 그렇게 며칠, 또 며칠, 어린아이 네댓이면 들 수 있을 만큼 비우고 비워내시더니 구십 생애를 비로소 내려놓으셨다. 윤효(尹曉) 시인 1956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 본명은 창식(昶植). 동국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198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물결』, 『얼음새꽃』, 『햇살방석』, 『참말』과 시선집 『언어경제학서설』이 있.. 2022. 8. 17.
<디카시>김백겸 시인 / 거미줄 몽상 김백겸 시인 / 거미줄 몽상 빗방울은 햇빛의 손가락에 속살을 잡혀 있습니다. 아무도 엿보지 못한 숲속의 고요는 일 캐러트 금강석으로 굳어 있습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8월호 발표 김백겸 시인 1953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 『비를 주제로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비밀정원』 『기호의 고고학』 등과 시론집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 『시를 읽는 천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實在)라는 광원(光源)』 등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主幹 역임. 현재 〈시힘〉, 〈화요문학〉동인. 대전시인협회상, 충남시인협회상 수상. 2022. 8. 17.
심언주 시인 / 엘리베이터 외 1편 심언주 시인 / 엘리베이터 어두운 하늘 위로 위로 올라간다. 나는 지금 천국에 간다. 어릴 때 동네 할머니들은 꽃상여를 타고 갔는데 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간다. 하늘이 가까운 아파트 17층. 이곳에선 아기별 꽃이 한 철도 못 넘긴 채 기진해 죽지만, 버튼 하나로 푹 꺼진 빵을 부풀릴 수 있다. 리모컨으로 당신과 내 날카로운 발톱 사이를 빠져나간 태풍의 흔적도 눈치 챌 수 있다. 가끔 하늘에 달을 쏘아 올린다. 몸뚱이 한쪽이 베여 걸리는 달. 누군가의 영혼을 싣고 비행기가 더 깊은 하늘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버튼을 그곳까지 눌러 보지만, 엘리베이터는 미루나무보다 조금 높은 곳, 17층까지만 나를 올려다 놓는다. 시간의 컨베이어가 돌고 있다. 포장을 끝낸 과자 봉지처럼 어느 지점에서 나는 그렇게 툭 떨어.. 2022. 8. 17.
최호남 시인 / 투명 외 2편 최호남 시인 / 투명 누가 나를 이렇게 환하게 들여다보고 있을까 투명 속은 언제나 투명 밖이니까 투명이 앞 지른다 비는 점점 많이 내린다 그칠 줄 모른다 투명은 어제이거나 아주 먼 이야기 그것은 늘 확실하고 투명 하다 투명이 포개진다. 투명 아래로 투명 이 겹쳐진다 투명 위로 투명이 금 간 오후를 적신다 숨어 있는 투명은 늘 술래다 비는 온몸이 비에 젖어 걷는다 비가 온다 비는 잘 걷지 못한다 오래 전에 떠난 너 여전히 투명 밖에 서 있고 언제나 기억이 나지 않아 과거는 투명이니까 빠져 나가버린 투명한 비밀이니까 최호남 시인 / 호모 에렉투스 잠이 잠을 잊어 버린다 발목을 잃어버린다 내릴 역이 잠이 든다 이어폰이 잠이 들면 내려도 안 내려도 괜찮아 좌석이 없어도 괜찮아 지하철에서도 손잡이를 잡을까 의자를.. 2022. 8. 17.
조송이 시인 / 압록 매운탕 외 2편 조송이 시인 / 압록 매운탕 여름이 산 채로 매달려 산발한 내장을 겨울바람에 맡기고 있다 떠나지 못해 소용돌이치다가 맞닥뜨리는 그곳 압록, 매운탕집 처마 밑에서 펄떡이는 무청 이파리들은 칼바람에 낯빛 싹둑싹둑 잘리어 말라비틀어져 가고 사람들도 통나무집 속에서 야위어 바람의 실타래에 친친 감기며 힐끔거린다 머리 거꾸로 처박고 강의 상류를 휘젓는 바람은 너럭바위에 퍼질러 앉아 오장육부 헹구며 방망이질하다가 푸른 바늘침 꼿꼿이 세워 어중간히 물기 품은 무청의 살을 콕콕 찌른다 겨우내 뒤집혀진 마음까지 마름질하여 찬 허공에 대고 마저 재봉을 하고 드륵드르륵 틀질까지 해댄다 바늘땀이 촘촘히 박혀 허공에 붙어사는 무청 시래기들 매운바람이 비린내를 먹으며 끓고 있는 무쇠 솥단지 옆 여름이 땀 뻘뻘 흘리며 겨울의 속살.. 2022. 8. 17.
[신 김대건·최양업 전] (59) 조선 사회의 폐습 [신 김대건·최양업 전] (59) 조선 사회의 폐습 신분제 사회 조선에서 모든 인간의 평등·존엄 실천한 인권운동가 가톨릭평화신문 2022.08.14 발행 [1674호] ▲ 최양업 신부는 조선 사회에 그리스도교 신앙과 문화에 기반한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했다. 사진은 CPBC가 제작한 드라마 ‘탁덕 최양업’의 한 장면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는 최양업 신부의 애민 정신을 잘 보여준다. 최양업 신부의 애민 정신과 인권 의식 최양업 신부는 가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폐단과 폐습을 개선하려 헌신했다. 최 신부는 무엇보다 조선 교회와 사회를 병들게 하는 신분제를 혁신하려 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비롯한 사회 약자를 우선으로 돕고 그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하려고 행동했다. 아울러 그리스도교 신앙을 기반으로.. 2022. 8. 17.
송은숙 시인 / 틈 외 1편 송은숙 시인 / 틈 ‘틈’이란 말에는 ㅌ과 ㅁ을 가르는 ㅡ가 있다 나는 그것을 시라 부르겠다 그러니까 시는 장롱에 들어가 눕는 일이다 ㅡ는 이불과 베개 사이에 자리 잡은 어린 ‘나’이다 앨리스는 나무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가 모자 장수를 만나고 나는 이불 사이에서 무수한 이불 같은 구름을 만들어 구름 나라 아이들과 논다 구름은 가볍고 따뜻하고 졸리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장롱 속에 웅크린 어둠이 등을 쓸고 지나가던 그 공포의 순간이 시였을까 그러니까 시는 틈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 손에 무엇이 닿을지 서늘한 어둠의 입자를 집요하게 살펴보는 일이다 바위틈에 자리한 새 둥지에 손을 넣어 알을 꺼낸 적이 있다 이불 틈에 넣어 둔 알의 두근거림과 내 심장의 두근거림이 마구 공명하던 어느 날이다 알은 날개를.. 2022. 8. 17.
유계영 시인 / 출구 외 2편 유계영 시인 / 출구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르고 그린 이마의 빛 때로는 태어나기 위해 스스로 불태웠다 겨울곤충은 우리들 손바닥 위에서 몸을 네 번 접고 죽어버렸다 투명한 눈꺼풀을 가지고 있어 자라지 않는 나의 잠 발소리를 죽이며 걷는 법을 배우고 죄 짓는 방법까지 알게 되었다 내일은 내일 오겠지 쫓아오는 것이 있다고 믿으며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더 많은 비를 맞을 것이다 우산의 얼굴이 바라보는 것은 모두 우산이라는 것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다만 우리가 할 일 유계영 시인 / 헤어지는 기분 뚜껑 달린 컵처럼 때로는 선택 받았다는 느낌 물건을 살 때마다 흰 것을 골랐다 36색 크레파스 중 끝까지 닳지 않던 색 꿈속에서 사람들이 분분히 펼쳤던 손바닥 모두 나와 악수하고 나를 지나쳐간다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왜.. 2022. 8. 17.
정수자 시인 / 작란 외 1편 정수자 시인 / 작란 가까이를 묻습니다 팔을 더 멀리 두며 금지가 많을수록 긍지가 줄어들듯 잡힐 듯 커져만 가는 착시의 작란처럼 가까이를 찾습니다 앞서려 흘리고 왔을 지하의 푸른 비명 빙하의 푸른 자진 멀리서 눈물겨웠나니 미리 쓴 미래처럼 -《상상인》 1호 정수자 시인 / 컨트롤씨 안녕? 어제의 나를 복기해 오늘의 나를 산다 Ctrl C 없이도 맥박은 같다는데 복부는 왜 불어나는지 뱃심은 또 풀리는지 컨트롤이 없어도 컨트롤씨는 여일하고 가두리 복제인가 이편저편 돌아보다 독박 쓴 행간이 있나 간을 재다 파하다 시라는 당랑거철 조라는 율의 당하 묘파는 수만린데 파란일랑 수수만리 여백도 박제가 될라 더늠이나 눌러보다 2022. 제16호 정수자 시인 1956년 용인에서 출생. 1984년 세종숭모제전 전국시조백일.. 2022. 8. 17.
박천순 시인 / 귀고리 외 1편 박천순 시인 / 귀고리 마음을 나뭇잎 모양으로 오린다면 어느 쪽이 먼저 물들까 침상에 노부부가 마주 앉아 있다 습자지처럼 가볍고 조글조글한 여자 납작한 허리가 반으로 접힌다 남자가 여자에게 미음을 떠먹인다 떠먹여도 넘겨지지 않는 미음이 어눌한 입가로 흘러내린다 남자의 마음이 타들어가며 먹어야 산다, 먹어야 산다 거듭 되뇌는 주문, 방바닥에 쌓인다 창밖에서 웅성대던 바람도 입을 닫은 저녁 빛바랜 나뭇잎 두 장 나란하다 말라가는 서로의 낯빛을 오래 곰삭은 눈빛으로 적시고 있다 먼저 물들었던 기억 놓지 않으면 어떻게 앞서 떨어질 수 있을까 박천순 시인 / 구름들 내 안에 구름이 산다 형태도 없고 머무르지도 못하는 구름이 떠돌고 있다 저물녘 골목을 지날 때 어둠이 스미듯 내게 스몄다 구름이 제멋대로이듯 내 감정.. 2022. 8. 17.
엄란숙 시인 / 연우가(南歌) 엄란숙 시인 / 연우가(南歌) -비는 그대 마음이다. 하늘이라는 곳간에서 명주솜만을 지게 가득 등에 지고 왔다 명주솜만큼 한 그대의 무게, 그대 보고플 적마다 지게 작대기로 마른 땅을 툭툭 치며 명주솜 한 뭉치 던져 산을 부려놓고 몇 걸음 걸음 그대 심심치 않으시도록 큰 소리로 바위를 불러 골짝을 만들고 주먹만한 솜뭉치, 뭉치 복숭아나무 끝에 매달아 장무상망(長無相忘) 불을 밝히면 때때로 마음 깊은 곳에서 흐르던 눈물, 눈물 맑은 여울을 이루기도 하였으나 그대 눈빛이 뿜어내던 한숨은 먹장구름으로 내 문턱을 넘어가지 못하였다 비는 그대 마음이다 명주솜으로 이룬 세상 하나 이토록 흠씬 젖게 하나니 그 세상속의 사람 하나 이토록 흠씬 울게 하나니 엄란숙 시인 1967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 전주대학교에서 국어.. 2022. 8.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