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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812

<디카시>김백겸 시인 / 숲 속의 저수지 김백겸 시인 / 숲 속의 저수지 연못에 비쳐있는 하늘은 명경(明鏡)과 같습니다. 바닥까지 비쳐 있는 저 세상의 풍경을 삿대로 건져낼 듯 합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8월호 발표 김백겸 시인 1953년 대전에서 출생. 충남대학교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등단. 시집 『비를 주제로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비밀정원』 『기호의 고고학』 등과 시론집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와 시인들』 『시를 읽는 천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實在)라는 광원(光源)』 등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主幹 역임. 현재 〈시힘〉, 〈화요문학〉동인. 대전시인협회상, 충남시인협회상 수상. 2022. 8. 18.
김온리 시인 / 영웅시대 외 5편 김온리 시인 / 영웅시대 영웅이 나타나기 전에 무슨 구름이 흘렀던가 폭우 속 울고 있던 아이의 손을 잡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준비가 되었던가 우리들의 세계는 이제 두근두근해졌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고장 난 시계의 시침 위에서 두리번거리듯 영웅이 손을 내미는데 손금이 아직도 자라는 중이라는 걸 믿어도 되는 걸까 폭우는 폭설처럼 쌓이지 않아서 영웅은 그저 영웅인 채로 비를 맞고 서 있을 뿐, 허밍 소리는 그 무렵 마법처럼 흘러나왔다 내가 영웅을 알아보는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영웅을 에워쌌지만, 패인 손금 위로 흐르는 빗물은 영웅과 나 사이를 이어주고 있다 영웅이 없는 시대라서 영웅은 별로 빛나고, 오늘 밤 휘파람을 부는 영웅의 바깥에서 나는 조용히 늙어가기로 한다 영웅은 그저 영웅인 채로 내 .. 2022. 8. 18.
조유리 시인 / 누란 가는 길 외 4편 조유리 시인 / 누란 가는 길 이 길을 감고 푸는 동안 내 몸에는 실오라기 한 올 남지 않았네 바늘귀에 바람의 갈기를 꿰어 길게 박음질한 신작로를 따라 걸어가는 저녁 봄 바깥으로 향한 솔기부터 올을 풀기 시작하네 바람이 모래구릉을 만들어 낙타풀을 키우는 땅 결리고 아픈 생의 안감을 뒤집어보면 천 년 전 행성이 반짝 켜졌다 사라지곤 하네 계절 품은 고름을 풀어 우기를 불러오고 초승달을 쪼개 먹다 목에 걸려 운 밤 캄캄한 잠실(蠶室)에 엎드려 산통을 열어 한 사내를 풀어 주었네 수천 겹 생각의 올이 봄에서 풀려나갈 때 내 살아 온 시간 다 바쳤어도 바람을 동여매지 못하리란 걸 알았네 내 몸속엔 이 지상에 없는 성채가 지어졌다 허물어지고 폐허가 된 태실(胎室)속 목숨을 걸고 돌아 갈 지평선 한 필지 숨겨두었네.. 2022. 8. 18.
한춘화 시인 / 어느 날 넝쿨장미처럼 외 2편 한춘화 시인 / 어느 날 넝쿨장미처럼 나는 상자 안에서 시작되었어요 방울뱀 소리를 수집하는 귀는 엄마가 아기 상자에 넣던 그 날 울던 빗소리에 뾰족하게 자랐어요 세상에 나오며 딴 급수 뇌성마비 1급 지체장애 1급 시각장애 1급 그림자 없는 방 안에 마른 인형처럼 눕히면 몇 년도 그대로 있을 수 있어요 누운 자리 그대로 살이 삭고 흰 뼈가 드러나 뱉지도 삼키지도 못해 뿌리내린, 복지시설 맨 끝 방에 기록으로 존재해요 꽃이 무엇인지도 몰라요 꽃 안 피는 시절이라고 우는 당신은 많이 반성하세요 무채색 위에 핀 얼룩 같은 방에서 통점으로 이루어진 몸 가진 나도 있어요 흰 사이즈 작은 방으로 가는 길 봉사자 등에 축 늘어진 머리가 흔들리는 것이 담장을 갓 넘은 넝쿨장미 같다는데 좋은 말 같아 웃었어요 사람이 늘 .. 2022. 8. 18.
박성준 시인 / 벌거숭이 기계의 사랑 외 1편 박성준 시인 / 벌거숭이 기계의 사랑 불타는 고리를 통과하는 사자들의 몸은 늘 젖어있다 막 뽑아낸 뿌리의 근성처럼 그리움이 많은 인간들은 눈을 자주 깜빡거리고 슬픔은 가볍게 손아귀를 통과하는 비누 조각만큼 환한 불빛 더 이상 식물이 자라지 않는 기분입니다 사과는 사과를 방치했던 만큼 사과에게로 간다 공기 중에 칼이 너무 많아 숨 쉬기가 힘들다 그토록 푸르고 아름답던 기계들에게 주목 없이도 아주 특별해지고 싶은 아이들에게 안녕, 그 많던 나의 고아들은 왜 수일이 지나서도 소설이 되지 않는가 박성준 시인 / 수증기 내일 오후, 애인이 떠나면서 선물한 벽지로 그는 도배를 할 것인가 그들은 서로에게 던지는 평서문에 대해 고민을 하는가 선량하다 이악스럽다 해맑게 억세다 삐뚤빼뚤 피가 흐른다? 무슨 말을 시작해야 .. 2022. 8. 18.
김상백 시인 / 설안雪眼 외 3편 제1회 문예바다신인상 당선작 김상백 시인 / 설안雪眼 1. 눈 내리지 않았고 하여 당신도 오지 않았다 매서운 추위 탓인가 두꺼운 얼음장에도 금이 간다 꾹 꾹 마음바닥을 찍을 때마다 장대 휘청인다 조각얼음을 타고 건너가는 발 시린 자정 2. 익어 가는 꽁치의 雪眼 하얀 접시에 꼬리지느러미 그리고 또 머리 삐죽이 내민다 끝으로 밀려 가면 저처럼 발과 머리 허공에 내놓고 살아야 하나 곽시쌍부 달이 진 눈 속 어둠이 깊다 김상백 시인 / 서해 저무는 바다 반달 걸리면 떨어지는 단두대 자비의 칼날 온몸으로 물고 우우우- 번지는 속죄의 노을 김상백 시인 / 가벼운 장례 선풍기 저 홀로 돈다 연옥에서 부는 바람 울먹이던 세간들 비닐 수의를 마련했다 활짝 핀 꽃불 속 놀러나 갈까 가벼운 외짝 날개 나비를 타고 뒤바뀐 .. 2022. 8. 18.
​이문희 시인 /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이문희 시인 /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희고 느린 꿈을 꾸는 중예요 아마도 이 꿈은 때죽나무 꽃 위에 내릴 것 같아요 한낮이 붉게 차갑다가 밤엔 눈보라같이 뜨거워져요 눈동자에 여행자의 짐을 많이 실어서 실명할거라는데요 물푸레 그네에서 분홍 토끼가 일러주었죠 늙은 괘종시계는 거꾸로 서서 손뼉을 열두 번 쳤고요 난 누군가를 기다릴 때면 책 읽는 버릇이 있죠 오늘은 무지개를 싹둑 잘라 책날개에 붙였어요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요 시인이 되는 건 나의 야망이 아니라는 페이지를 멈춰요 심장을 켜면 음악이 흐르는 노란 시를 쓸 겁니다 언덕 위 벽돌집으로 와서 읽어줄래요? 변덕스런 난 마당가 맨드라미를 닮았대요 난쟁이 할머니가 알려 줬어요 두 가지 꽃이 피는 나무에서 내가 태어났는데 그러니까 내가 우울한 것도 검정양산만.. 2022. 8. 18.
이금란 시인 / 새로 만들어진 낭만 이금란 시인 / 새로 만들어진 낭만 죽은 새를 키우고 있다 새는 밤으로 된 거품 속 벌레만을 잘근잘근 씹었다 공중을 잃은 동공은 강물이 흐르지 않았고 부리 끝에 매달린 울음소리는 새장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절벽 끝에서 바람을 마셔버렸다 몸집을 부풀리며 먼 아침과 대서양을 향해 날개를 키우려 했던 시간은 꺾이고 갈 수 없는 계절의 꽃은 피었다 진다 어떤 날은 시간과 꽃이 피지 않고 시들었다 뒷걸음질 쳐도 떨어질 수 없는 낭떠러지 벽이 있고, 모든 벽은 시작되는 위치에 있다 부딪치는 세계는 항상 푸른색 화면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낭떠러지는 날아가서 도달하기에 가깝고 안전한 곳 드디어 아침이야 수북한 깃털을 쓸어모으고 상처뿐인 이마를 어루만져 주는 것은 오른 손 커피잔이 뜨거워 왼 손으로 옮겨가는 지극히 낭만.. 2022. 8. 18.
손준호 시인 / 인형 뽑기 외 1편 성명남 시인 / 귀가 자라는 집 아래층에 이사 온 여자가 소리를 수거해 가기 시작했다 무심히 낭비한 소리가 귓바퀴에 가파르게 쌓이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목조목 파냈다 그녀가 건넨 소음 목록에 dB(데시벨)로 표기한 발꿈치가 콩콩 뛰어다녔다 한 살 터울 쑥쑥 크는 발목 묶어놓고 바닥이 종일 진땀을 뺐다 집안 대소사가 있던 날 왁자한 웃음소리마저 목록에 추가됐다 인터폰 소리를 제일 싫어하는 바닥이 공학적 히스테리에 빠진 타코마* 다리처럼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위층과 아래층 사이엔 천장만 남았다 소심한 고양이도 발꿈치를 들고 걷는다 * 미국 워싱턴 주 타코마 해협에 놓인 840m 현수교, 성명남 시인 / 아버지, 고래 말이 없었던 아버지는 저녁이면 한 마리 고래가 됐다 단골집이 있을 법도 한데 늘 왁자지껄한 .. 2022. 8. 18.
전재섭 시인 / 적막한 사랑 외 2편 전재섭 시인 / 적막한 사랑 너는 뒤란에 핀 목마른 나의 여인이었으니 산사의 풍경소리마저 잠들어 적막에 깃든 밤에 우리는 이끼 낀 천년석등에 초록불 밝히고 물소리로 점점 깊어져서 저문 강을 건넌다 우리의 숨은 사랑이 찬 서리 내리는 겨울밤 초록별로 떠서 새벽 동종소리를 듣고 있다 민들레 홀씨처럼 허공을 날다가 동트는 아침 어느 척박한 대지에서라도 씨앗이 발아해 수종사 석등 아래 흰눈이 푹푹 쌓이는 밤 겨울 동종소리로 목청껏 울고 싶다 전재섭 시인 / 나는 처음부터 남루였다 남루가 되고나서야 별이 보인다고 어느 시인이 말한다 가난한 소년시절 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서 바라보던 밤하늘의 별들은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아파트 공사장 함바집에서 물지게를 지며 비계목 위에 누워서 바라보는 별들도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 2022. 8. 18.
정숙 시인 / 도배장이 외 1편 정숙 시인 / 도배장이 왜 벽만 보이는 걸까 벽이 내 앞을 가로막아 설 때마다 활짝 웃는 장미꽃무늬 벽지를 바른다 간혹 다 떼어내지 못한 가시발톱이 줄을 세우기도 하지만 무작정 그 위에 연꽃 도배지를 눌러 바른다 삶이 뿌리는 저 검은 그림자들 앞을 보나, 뒤돌아보나 벽이 길 막고 서 있다 사랑하는 이들 사이 애증과 꽃과 꽃가시 사이 해맑은 웃음과 눈물 사이 모든 틈새에 벽지를 발라 위장해야 한다며 없는 벽, 쌓기도 하는 난 허술하고도 시시한 시, 도배장이 -시집 / 시산맥, 2020 정숙 시인 / 우포늪에서 어느 날 문득 깨달았던 것이다. 생각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흐르는 물은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을, 푸우욱 썩어 늪이 되어 깊이 깨달아야 겨우 작은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으리라 퍼뜩 생각났던 .. 2022. 8. 18.
홍일표 시인 / 빵 홍일표 시인 / 빵 나는 부풀어 무명의 신에게 닿는다 얼굴 없는 나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여 달의 종족이거나 오리 알쯤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몸을 떼어 몇 개의 알을 더 낳기도 한다 이미 죽어서 지워진 몸 용서라는 말은 하지 말자 당신을 만나는 동안 작은 속삭임으로 신의 귀를 간질인다 시간의 악몽을 통과하는 잠 어둠으로 빚은 세계의 모퉁이에 부딪힌 빛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이곳에서 저곳까지 길이 없으니 나는 아직 까막눈이고 하느님도 보지 못한 희고 둥근 시간의 덩어리들 꽉꽉 눌러 사라진 꽃의 표정을 찾는다 여기저기 귀들이 펄럭인다 입이 돋는다 목련이 오래 감추어둔 혀를 내밀어 종알거리듯 곳곳에서 부풀어 오르는 환한 살풍선들 제 말이 들리나요 밀가루 반죽 속에서 동글동글 태어나는 목소리들 나는 여전히 뜨.. 2022. 8.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