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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910

류여 시인 / 옹이 외 2편 류여 시인 / 옹이 소나무 등걸 한가운데 한때 온몸의 신경이 소용돌이치다 굳어졌을 흔적이 있다 한 나무가 등을 내밀어 껍질을 이루고 밖으로 튀어나와 척추로 휘어졌을 중심 생물의 발뒤꿈치를 보면 안다 발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송곳 같은 신경이 서 있었던, 거기 나비도 비가 오면 날개를 접어 팽팽하게 다리를 붙인다 이파리 중심에 매달린다 어둠의 촉수를 견디며 일어서는 일 손이 무디어질 때까지 내면을 받아 내는 일 나는 늘 빗길에 붙어있었다 젖은 발은 눈물이 보이지 않았다 삐꺽 이는 소리만 등에 젖었다 심야에 눈이 붉어진 사람은 보인다 내가 그림자 같을 때 낭떠러지처럼 가늘어질 때 체면이 되어준 철심 내 앙다문 이빨 아래턱 한가운데, 갈비뼈 아래, 척추 한가운데, 발바닥을 중심으로 나를 세우고 서 있는 분노 반.. 2022. 8. 19.
송문문 시인 / 매화틀 송문문 시인 / 매화틀 동생들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요양원 앞 인적 드문 초봄 길을 걷는데 -나 똥 싸-하신다 여든 여덟 아기 매화꽃 아래 옷 내리고 볼 일을 보신다 부드러운 잎사귀들은 오월 속에 접혀 있어 지나가는 바람과 아들 한 딸 둘 벙그는 매화향 까지 갑자기 바빠졌다 어머니는 세 살 노릇 참 쉽게 하시고 아들은 열 살 다리로 돌아가 요양원까지 뛰어가고 딸 둘은 문인수 시인의 '쉬' 속에 들어 바람벽을 웃음으로 엮고 아들이 가쁜 숨으로 하얀 분첩을 드리자 어머니 딸 둘이 드리는 두레박에 매화량 가득 담아 건네신다 어머니가 그렸던 매화 등걸이 매화틀이 되는 꿈을 꾸었을 까? 어린 쑥이 쑥쑥 크는 소리 쑤욱쑥 메아리도 쑤욱쑥이다 송문문 시인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 《시와 표현》으로 .. 2022. 8. 19.
김휼 시인 / 달을 위한 레퀴엠 외 1편 김휼 시인 / 달을 위한 레퀴엠 질문처럼 솟은 봉우리가 그믐이 되면 우린 원점으로 돌아가지 상처를 쥐고 꿈밖 쓸쓸한 허밍으로 사라져간 초승 절반의 실패를 살던 하현의 등엔 절벽만 놓이고 더는 밀려날 수 없는 그믐이 되면 꽃잎 흩날리는 꿈들은 검은 밤에 묻히지 삭망의 주기는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동안 그믐을 거쳐 간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농담들 너를 위해서라면 저 하늘의 달도 따다 줄게 계수나무에 앉아 떠밀려간 꿈들을 무망이 바라보곤 하지 은쟁반 위에 차갑게 식어버린 농담 당신이 구두를 벗지 못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번지고 흘러 만월의 끝에 닿는 그믐이 되면, 세상 모든 농담은 어둠에 묻히지 만장을 두르고 내려오는 붉은 눈의 토끼들 쓸쓸히 짓무른 만가를 부르지 웹진『시인뉴스 포엠』 2022년 1월호 .. 2022. 8. 19.
유재영 시인 / 다시 월정리에서 외 1편 유재영 시인 / 다시 월정리에서 정강이 말간 곤충 반점으로 울고 있는 등 굽은 언덕 아래 마당 넓은 집이 한 채 나뭇잎 지는 소리가 작은 창을 가리고 갈대꽃 하얀 바람 목이 쉬는 저문 강을 집 나간 소식들이 말없이 건너온다 내 생의 깊은 적막도 모로 눕는 월정리 유재영 시인 / 은유로 오는 가을 1 달빛이나 담아둘까 새로 바른 한지창에 누구의 그림에서 빠져나온 행렬인가 기러기 머언 그림자 무단으로 날아들고 2 따라 놓은 찻잔 위에 손님같이 담긴 구름 펴든 책장 사이로 마른 열매 떨어지는 조용한 세상의 한때, 이 가을의 은유여 3 개미취 피고 지는 절로 굽은 길을 가다 밑둥 굵은 나무 아래 멈추어 기대서면 지는 잎, 쌓이는 소리 작은 귀가 간지럽다 2021. 제30호 - 제12회 이호우시조문학상 유재영 시.. 2022. 8. 19.
손준호 시인 / 인형 뽑기 외 1편 손준호 시인 / 인형 뽑기 아빠는 뽑기의 달인 사닥다리 타고 하늘벽 올라가는 타워크레인 기사 공중으로 무전이 날아오면 뭐든지 뽑아 올리지 철근을 뽑고 목재를 뽑고 밑턱구름도 건져 올리지 아빠를 빼닮은 나는 인형 뽑기 선수 골목 끝 빈 상가 인형뽑기방 생겼다고 불황인가 봐, 물티슈 쏙쏙 뽑으며 혀를 차는 엄마 그날부터 나는 꿈을 꾸지, 찰랑거리는 호주머니 오백 원 동전 넣고 은빛 집게 팔을 조종하지 칼날 같은 경계 속으로 형광등 불빛이 발목을 꺾지 눈알 반들반들한 인형의 털실이 촉각을 곤두세우지 우린 먼 우주의 꼭두각시일지 몰라, 어쩌면 유리에 갇힌 저 인형들처럼 말야, 나는 동전을 다시 넣으며 중얼거리지 인형의 영혼을 번역하는 직업이면 좋겠어 새들의 음을 베껴 악보에 옮겨 놓듯 말야 바람의 귀에 대고 유.. 2022. 8. 19.
이성혜 시인 / 도대체 뭐란 말인가? 외 1편 이성혜 시인 / 도대체 뭐란 말인가? 묵은 신문지 같은 하늘이 뭉개져 내리고, 그 틈새로 찐득한 시거내가 배어날 것 같다고 인텔리겐차 인텔리겐찌야 토스토예프스키 혁명 전복……을 떠올릴 필요는 없는 거다 정동길, 생각하는 사람이 팽팽 소리를 지르며 팽창한다 턱이 뾰족한 청년이 제인 에어 포스터를 보며 씨네큐브 앞을 서성인다, 닿지 않는 바닥을 향해 종일 망치질 해대는 사람의 화두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광화문 대형 문고 글판에 눈을 두고 있다 ‘별안간 꽃이 사고 싶다, 꽃을 안사면 무엇을 산단 말인가?’ 군화소리 요란하게 빗방울이 진격해 온다 우산을 든 여학생이 편의점에서 나오고 하늘, 작은 창에 해바라기 세 송이 피어오른다 오드리 헵번에게서 우주를 봤다는 카쉬, 사진전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의 행인이 눈썹 없.. 2022. 8. 19.
백소연 시인 / 무등(無等) 가는 길 외 1편 백소연 시인 / 무등(無等) 가는 길 은사시나무 군무에 둘러싸인 생각의 우듬지가 사정없이 펄럭입니다 무등 깊은 산, 문이 열릴 때마다 억새들 속울음 비탈길로 휘몰아칩니다 거문고가 된 내 몸은 말의 언어를 몸에 맡겼습니다 목놓아 흔들리며 떠나는 것이 어찌 저들뿐이겠습니까만 칼보다 강한 문장들은 뿌리 끝에 내려앉고 흔들리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보다 강하다는 진리를 눈치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다 저문 능선을 타고 한 호흡, 한 허리로 걷는 길이 이토록 찬란할 수 있을까요 이 산 저 산 제멋대로 풀어놓은 미치광이 칼바람 헤쳐나오며 생생 비상하는 텃새들, 저들 또한 다가올 내일을 위해 기다림에 못 박혀 산다는 말 굳게 믿어집디다 백소연 시인 / 김씨네 철물점 고장 잦은 기호, 아무도 읽어내지 못.. 2022. 8. 19.
양수덕 시인 / 새에게 물어봐 외 2편 양수덕 시인 / 새에게 물어봐 새는 날 수 있으니 인간보다 낫지 새는 어디든 갈 수 있으니 또 그렇지 새는 노래하며 즐겁지 새는 골머리를 썩이는 일이 없지 새는 빈손으로도 잘 살지 새는 질기게 미워하지 않지 새는 전쟁을 안 하지 새는 스스로 짝을 찾지 새는 늘 자연 속에서 살지 새는 하늘과 가까이 있지 새가 부럽다고 했던 어머니 새보다 머리가 훨씬 더 큰 인간이, 왕관을 쓴 호모사피엔스가, 새대가리를 부러워하여 양수덕 시인 / 머나먼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나날이 지친다 내가 비명을 지를 때 네가 콧노래로 듣고 네가 한숨 쉴 때 가벼운 바람으로 듣는 나 무채색, 무뇌의, 공간이 자라고 두꺼워지고 차가워지고 사랑은 주머니가 채워지지 않는 거래 들어오면 나가고 나가다 다시 들어오기를 무수히, 얽힌 동선들만 .. 2022. 8. 19.
김숙영 시인 / 연필의 노래 외 4편 김숙영 시인 / 연필의 노래 ​ 의미 없이 만지지 마세요 난 흑심을 가지고 있어요 본 대로 말하는 것보다 안 본 것까지 이야기하는 방식을 좋아해요 알리바이를 꾸밀까요 몽타주를 내밀까요 낮의 초현실주의나 밤의 상징주의를 이젠 뛰어넘고 싶어요 처음부터 나는 쓱쓱과 싹싹을 품었어요 빨리 백지를 주세요 예상하지 못한 문장을 천천히 적어 내려갈 테니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술술 자백을 뽑아낼 테니 ​ 당신은 언제나 주인공만 하세요 멋진 프롤로그를 가지고 있는 스타가 되세요 악역은 전부 내가 할래요 나쁜 건 내가 다 뒤집어쓸래요 그렇다고 무시하거나 다그치진 말아요 욱하는 순간 부러질지 몰라요 육하원칙을 지키면서 본질만을 제시할지 몰라요 어젯밤 당신은 독주를 앞에 두고 일탈을 꿈꿨지요 나의 용도를 바꾸려고 마음먹었지요.. 2022. 8. 19.
이낙봉 시인 / 개 외 1편 이낙봉 시인 / 개 등 낮추고 꼬리 내린 개, 침 질질 흘리는 개, 막다른 골목에서 이빨 감추고 쓰레기통 옆에서 비 맞는 개, 황홀하게 부서지는 아카시 꽃잎 따먹던 시절의 개, 배고파도 굶고 졸려도 자지 못하는 개, 버석버석 말라가는 개, 사랑하고 싶은 개, 붉은 성기 달렁 대는 개, 이빨 감추고 비루먹 다 살아남을 개, 이낙봉 시인 / 부처와 예수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나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 껄껄 웃고 홀연히 입적했다는 만공, 낡은 옷이 덕숭산 수덕사에 걸려 있다. 성처녀가 아기를 낳았다고 한다. 눈 먼 자 눈 뜨게 하고 앉은뱅이 걷게 했다고 한다. 처형된 후 3일 만에 부활했다고 한다. 붉은 옷이 서울 하늘에 널려 있다. 나는 매일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피운다.. 2022. 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