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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367

조은길 시인 / 삼류 시인 외 1편 조은길 시인 / 삼류 시인 남자에게 끌려간 아이가 사타구니가 만신창이로 찢어진 여자아이가 생피를 쏟으며 죽어가고 있는데 운문 형식 산문 형식 따지며 저 여자아이에 관한 시를 써도 괜찮을까 가난한 비정규직 청년이 안전장치도 없는 컨베이어 벨트에 몸이 끼어 몸이 동강 나 죽었는데 원관념 보조관념 따지며 저 청년에 관한 시를 써도 괜찮을까 쇠창살에 갇힌 닭들이 손톱 발톱 부리를 빼앗긴 수많은 닭들이 밤도 낮도 없이 알을 빼다 살처분되었는데 은유법 환유법 따지며 저 닭들에 관한 시를 써도 괜찮을까 늙고 병든 사람이 자식들에게 폐 될까 봐 말없이 앓다 구더기 밥이 되었는데 비장미 숭고미 따지며 저 구더기 밥에 관한 시를 써도 괜찮을까 행 구분 연 구분 운율까지 딱딱 들어맞는 이런 시를 써도 정말 괜찮을까 조은길 .. 2022. 8. 1.
이선 시인 / 갈라파고스 Galapagos 섬에서 1 외 1편 이선 시인 / 갈라파고스 Galapagos 섬에서 1 갈라파고스 섬에는 파란 발의 새가 있다 바다코끼리를 향해 활을 겨누는, 원시사내의 팔뚝에 조개를 삼킨 새가 부리를 닦는다 "달빛 잎눈이 점점 어두워가요, 초록바다에 지쳤어요" 맹그로부나무 그늘에 누워, 원시여자를 맨발로 벌거벗은 원시사내의 무성한 가슴털을 혜집으며 투정한다 "들꽃이 시들었구려, 비단뱀이 옆구리에 기대어 낮잠을 청해 봐요" 원시사내는 원시여자의 조그만 발을 쓸어 당긴다 (사내의 거친 숨소리, 주술처럼 여자는 눈을 감고) (열아홉 개 작은 섬, 슬몃슬몃 눈을 뜨고) "날개가 퇴화한 코바네우 전설"을 들려주는 바다이구아나, -갈라파고스 거북이,귀를 쏭긋쏭긋 다윈의 노란 손바닥책 속에서 방금 튀어나온 핀치 새가 베로-롱 베-롱 쫑쫑 낮잠꾸러기.. 2022. 8. 1.
권순해 시인 / 아득함에 대하여 외 4편 권순해 시인 / 아득함에 대하여 식탁 위 식은 커피와 먹다 남은 도넛의 오른쪽과 넘기다 만 문장이 내가 읽은 너의 마지막 문장 혈관 속으로 밀려왔다 부서지고 밀려왔다 사라지고 또 밀려오는 봉은사 영각전 툇마루에 앉아 또닥또닥 떨어지는 빗방울 지키며 식은 커피와 도넛 조각과 영각전의 아득한 거리를 가늠해 본다 권순해 시인 / 너를 기억하는 방식 블라우스 한쪽 소매가 옷장 속에 구겨져 있다 누군가 다녀간 깊은 흔적 미세하게 떨리던 최초의 순간을 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안으로 걸었던 겹겹 빗장처럼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방향을 알 수 없는 가물가물한 기억 더듬더듬 거슬러 올라가 손에 땀이 배도록 움켜쥐었던 은밀한 꽃의 계절 천천히 다림질한다 권순해 시인 / 간이역 오래된 책의 행간에서 툭 떨어지는 사진 한 장.. 2022. 8. 1.
박미라 시인 / 뫼비우스의 띠 외 2편 박미라 시인 / 뫼비우스의 띠 어머니를 낳을 수 없어서 딸을 낳았습니다 어머니가 되고 싶어서 딸을 낳았습니다 아침마다 머리를 빗겨주시는 떡갈나무 그늘을 옮겨다 주시는 어머니와 어머니 사이에서 나는 고아처럼 서럽습니다 딸을 낳으려다 나를 낳고 말았습니다 나한테 미안해서 울 뻔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히 비겁합니다 박미라 시인 / 도플갱어 45억 년 넘게 그렇게 계시다니! 무엇을 견주어 달을 말하겠는가 그러나 온갖 원망과 간절을 받아 안는 달빛 너머에는 터지고 패인 분화구 가득하다니 그렇다면 여기도 천지사방에 달이다. 봐라, 달! 저기 또 저기 달이 지나가신다 뛰어가신다 맨발의 달이 절름절름 가신다 마른 정강이를 내보이며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달이 지나가신다 터진 치맛단을 추스르며 달린다 둥둥 떠 가신다 저기 .. 2022. 8. 1.
황경순 시인 / 봄쑥처럼 외 1편 황경순 시인 / 봄쑥처럼 쑥은 봄웃음이다 겨우내 움추렸던 땅에게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고 땅을 밟는 사람에게도 활짝 웃어준다 보송보송한 솜털로 땅도 간지럽히고 쑥 뜯는 사람의 손바닥도 간지럽히며 향기로움까지 얹어 봄바람도 웃긴다 누가 쑥대밭이라 했지? 누가 쑥스럽다고 했지? 잡초들도 아직 덜 깨어난 이른 봄 쑥들이 예서제서 웃는 법을 가르친다. 쑥무리로 쑥절편으로 쑥찜으로 수천 년 받들어온 힘을 모아 주는 법을 가르친다 흐뭇한 미소 전수 받고 쪼그리고 앉아 가장 먼저 핀 쑥 밑동을 똑 따도 그저 하얗게 웃고 있는 봄 쑥! ―『문학과창작』 2011년 여름호 황경순 시인 / 나는 오늘, 바닷물이 되었다 해수관음을 보는 순간, 나는 바닷물이 되었다 물고기 떼와 함께 해수관음을 향해 흘러간다 그의 손길이 미치는 .. 2022. 8. 1.
강에리 시인 / 천년의 꿈 외 2편 강에리 시인 / 천년의 꿈 대숲에 불어오는 바람은 기억하네 푸르른 절규들이 낙화암 감도는데 쓸쓸한 웅진나루에 기다림이 끝없네 천년을 기다리면 그님이 온다하네 부소산 왕벚나무 잠깨어 꽃이 피면 사슬에 묶여 떠났던 고운님이 온다네 궁야평 너른 들에 봉황이 춤을 추고 사비강 푸른 물에 금룡이 포효하면 유황산 보름달 같은 고운님이 오시네 강에리 시인 / 나 억새로 태어나도 좋으리 세월이 흘러 여러 번 윤회가 된다면 어느 한생엔 언덕 위에 억새로 태어나도 좋으리 뿌리만 내리고 서서 비만 기다리는 삶도 좋으리 바람에 온몸 맡기고 흔들려도 좋으리 나는 목소리 없어 울어도 그대 들리지 않고 두 다리 없어 그대에게 다가갈 수 없고 두 팔 없어 그대 안을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좋으리 모든 것 할 수 있지만 .. 2022. 8. 1.
박미산 시인 / 부푼 말이 달콤해 외 1편 박미산 시인 / 부푼 말이 달콤해 말을 부수고 섞어서 반죽을 한다 부풀어 오르다 튀어나온다 말 하나,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발 없는 말을 타고 달린다 윗말 아랫말에 말 둘, 말은 입 안 가득 냄새를 풍기며 한참을 짓이기다 쪼아 먹곤 더욱 더 탱탱해진 말을 주둥이로 물고 다시 달린다 말 셋, 따끈따끈한 말을 코앞에 흔들며 꿈쩍 않으려는 입마저도 툭 툭 건드리며 호출한다 말 넷, 다시 반죽 한다 더 커진 말 더 달콤해진 말 말들이 한꺼번에 삼킨다 주둥이들이 쏟아진다 소리보다 앞서 말이 말처럼 뛴다 박미산 시인 / 세신목욕탕 허리 굽은 그녀가 탕 안으로 들어온다 자글자글 물주름이 인다 목만 내밀고 있던 여자가 묻는다 몇 살이슈? 여든 일곱이유 난 아흔 둘이여 잘 익은 살갗을 열어젖히며 목청을 뽑는다 얼굴이 뽀.. 2022.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