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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훈 시인 / 사구(砂丘) 외 1편 임지훈 시인 / 사구(砂丘) 수평선을 옮기기 위해붉은 두 줄을 그었다 이사 온 수선(水線)은좁아진 잠으로 출렁거리고 바다에 남은 식구를 마저 데리러 갔지만빨랫줄 위에 깃털 몇 경계를 지우며 불어온 바람칸두라* 그늘에 갇혔다 편서풍을 밀어내사구를 솟아나게 하는 힘 바람의 뼈가 차곡차곡빗금에 쌓여간다 깃털을 삼킨 해연(海淵)의 게송간극이 가파르다 밤이 밀고 가는 배 한 척 교교하고유유히 멀어지는 지느러미 휘어진 선에서 레드까지아직 잠의 관할에 속해 있다 * 아랍 남자의 전통 복장. 임지훈 시인 / 베개 베개에 얼굴을 묻고사람을 떠올린다긴 생각에 잠이 갈대처럼 텅 비어간다그늘에 꽂혀 있는 벚나무가지 위에 위태롭게 걸린초승달이소리 없이 꽃잎을 자르고 있다손톱보다 작은 봉오리눈감고 연못으로 내려앉는다옆에서 자고 .. 2022. 9. 27.
허호석 시인 / 마이산골 해맞이 외 1편 허호석 시인 / 마이산골 해맞이 햇살의 첫동네 마이산골태초에 예정된 물의 고향신비의 산하여!금강에 섬진강에 호남의 풍요를 거느렸다 1월1일, 저 동녘 어두움의 빗장을 열고노령의 줄기줄기 파도를 넘어홰를 치며 솟구치는 해은혜로운 하늘의 얼굴을 보라 저리도 벅찬 축복의 선물받들며 받들며 우리모두 두 팔 벌려뜨겁게 뜨겁게 가슴에 안자 용담호 天地가 물안개 걷우고새하늘을 갈아끼우듯우리들의 가슴가슴에도새하늘을 갈아끼우리새날을 갈아끼우리 해야 해야 우리 해야어려움이 있습니까, 부족함이 있습니까소망하는 한점 남기지 않게얽히설킨 매듭을 풀어뜨거운 가슴으로 살게 하소서차고 넘치는 햇살의 고장이 되게 하소서 허호석 시인 / 아버지 산 처럼 묵묵히가장의 멍에를 등에 지고산밭을 일구시며살다살다 헛딛어 사는것도헛기침 몇번으로 .. 2022. 9. 27.
이영숙 시인(철원) / 한낮의 해적 이영숙 시인(철원) / 한낮의 해적 빙하가 녹아 지구가 반쯤 물에 잠겼다도시의 무릎이 잘리고저지대는 저도 모르게 무의식이 깊어져 갔다산모들의 태몽도 물에 잠겨 퉁퉁 불었다 버스가 유턴하면지하보도의 공기가 휘어지던 사거리보도블록을 따라가다 보면 집이 나왔고굴절되는 사물의 목록을 외지 않아도 열리던 현관문천둥 치니모과 떨어지는 소리 들리지 않던 밤이 있었다심장은 그때 달의 뒤편처럼 어두워베개를 짓누른 귀에서 들리는 맥박수나 맞춰보고 있었다일개 소대쯤 행군하는 고요한 밤이었다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모든 물이 소금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소금공장을 끄려고 해도대륙조차 이미 들불처럼 만연했으니 부식되지 않은 물빛과 물맛을 찾아금속조각같이 번쩍이는 해적들이 출몰할 시각택시가 멎듯해적 하나 다가와서 손목을 척 비.. 2022. 9. 27.
김하늘 시인 / 12월 21일 49초 김하늘 시인 / 12월 21일 49초 현기증이 나흐물흐물한 공중으로 데려가 줘고래 울음소리가 들리니?조용히 있는 것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너무 시끄러운 꿈을 꾸고 있거든나는 초조하고, 초조하고,아무것에게서 감정을 가질 수 없어어느 날 사라져도 너무 당연한 것처럼 발칙한 년이라고 해줘그런 식으로 사랑받고 싶어발목에는 리본을 묶고머리에서는 백합향이 났으면 좋겠어아픈 꿈을 꿨는데, 아무도 울어주지 않았어우리는 다르고, 달라서,이해받기를 바란 쪽이 잘못한 거야나는 나를 자조할 이유가 있어 알몸으로 춤을 췄어이다음 12월 21일 49초를 기억해그 날은 죽기 좋은 날이야아아, 얼마나 더 심심해야하지?혼자서 애쓰고 싶진 않아모자를 눌러 쓰고 담배를 사러 나가야지비가 내리면 좋겠네맨발로 질주할 거야 온 거리를이를 드러내.. 2022. 9. 27.
[정규한 신부와 함께하는 기도 따라하기] (2) 나를 위한 하느님의 준비(사랑) [정규한 신부와 함께하는 기도 따라하기] (2) 나를 위한 하느님의 준비(사랑) 가톨릭신문 2022-09-18 [제3311호, 15면] ■ 성경 구절: 창세 1,1-23 천지창조(첫째 날에서 다섯째 날까지) ■ 청할 은총: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 선물에 대한 감사의 은총을 청합니다. ■ 기도 요점: 1.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보면서 나라면 어떻게 창조했을까를 상상해 보며 내가 창조한 것은 누구를 위한 창조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미리 인간을 위한 것들을 준비하고 계셨음과 비교해 보세요. 그리고 하느님과 나의 창조 이유가 다르다면,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2.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4절)고 하셨는데 .. 2022. 9. 27.
한연희 시인 / 요란 외 1편 한연희 시인 / 요란 앞니가 깨지도록 오늘을 굴러요 대디가 나를 잡아채기 전에 마미가 엉덩이를 걷어차기 전에 어서어서 굴러가요 멍 안에 새로이 자란 명 열한 시가 재빨리 한 시가 되는 일 시간의 교묘한 수법이에요 유유히 지나는 가로등 불빛처럼 얼굴이 샛노래져요 내 이름은 요란, 고장 난 시곗바늘이 한 바퀴 돌기 시작합니다 부엌에서 화장실로 소파에서 세숫대야로 데굴데굴 냉장고와 부딪쳐요 텔레비전을 엎어트려요 책장에서 점프하는 순간 산산조각 나요 수십 명의 내가 요란을 주워요 요란을 뭉쳐요 나는 달걀이에요 공 벌레 아니 구멍이에요 내가 내 속으로 점점 빠져들어 팔을 잃어버리고 귀를 잃어버려요 여기가 어딘 줄 모르고 나는 우뚝 섭니다 쉽게 깨질 거면서 대디, 뭐 그리 단단한가요? 눈썹을 어디에 붙였죠? 날이 .. 2022. 9. 27.
심창만 시인 / 수련(睡蓮) 외 1편 심창만 시인 / 수련(睡蓮)​선정(禪定)은 조는 것풀끝에서 뿌리로졸음을 밟고 내려가는 것내려가 맨발로 진흙을 밟는 것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차지게 뭉개내는 것물비린내 나도록발자국을 지우는 것지운 얼굴 위로 물을 채우는 것물방개처럼 허우적대지 않고구름의 실뿌리를 놓아주는 것오후 두 시에도 순례자를 맞는 것그의 빈 꽃받침 위에 잠시 머무는 것그의 친구의 꽃받침 위에도 나누어 머무는 것이런 날은 늦게까지 하루를 놓아주는 것 그러나 잊지 않는 것물 마당을 쓸어놓고 어둠을 맞는 일밤 깊은 실뿌리부터 다시 밟는 일정수리가 환하도록밤새 진흙을 밟는 일진흙을 밟고아침 끝에 올라앉는 일 ㅡ『공정한 시인의 사회』(2019, 8월호) 심창만 시인 / 마장동 고기시장 협객처럼,육림의 숲을 지나가네 머리 발톱 내장 털다 떼어낸비릿.. 2022. 9. 27.
[가톨릭교회의 거룩한 표징들] (18) 성당 문 [가톨릭교회의 거룩한 표징들] (18) 성당 문 ‘구원의 문’이신 그리스도 드러내는 표징 가톨릭평화신문 2022.09.25 발행 [1679호] ▲ 성당 문은 구원의 문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거룩한 표징이다. 사진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5년 12월 8일 자비의 희년 개막일에 ‘거룩한 문’(porta sancta)을 열고 성 베드로 대성전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CNS 자료 사진】 문(門)은 다른 공간으로 이끄는 경계이다. 성경에서도 문은 안과 밖, 어제와 오늘, 거룩함과 속됨, 생명과 죽음의 갈림목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뿐 아니라 단테의 「신곡」과 같은 문학 작품의 영향을 받아 천국과 지옥에도 문이 있다고 상상하며 베드로 사도를 천국의 수문장으로, 루시퍼를 지옥의 우두머리.. 2022. 9. 27.
권수찬 시인 / 나비의 거리 권수찬 시인 / 나비의 거리 꽃의 유혹을 바삐 쫒다 몸이 갸우뚱했다오랜 시간 날개들이 굳은 정원 속,그곳 풍경들이 처음부터 눈에 들어왔던 것은 아니다어머니가 다른 분신으로 부화되었던 곳꿈 속 길 찾아 전시관 구석구석 날아다녔다 화상 입은 입구로 들어섰다온종일 현란한 빛에 둘러싸인 희뿌연 애벌레들이곳의 빛들이 내겐 꽃으로 보였다꿈틀거리는 날개는꽃들에게 속삭임을 보내느라 부서질 뻔했다여러 곳에 모여든 다층의 나비들이 팔랑대는 거리는내밀한 수작(酬酌)과 함께 작은 비명으로 들썩거렸다저마다 꽃들은 거울을 하나씩 숨기고 있어작은 날개가 푸드덕거릴 때마다,사방 코끝으로 전해오는 열 배 스무 배 향을 내뿜었다 좌우 거리는 마술에 걸렸다누군가 본 떠 찍은 판화 속 날개 자락들,불룩한 향기를 되새기느라거리는 수많은 알의.. 2022. 9. 27.
최해돈 시인 / 바퀴의 묵언 외 2편 최해돈 시인 / 바퀴의 묵언 아파트 주차장꿈적 않는 승용차 바퀴 그가 찐빵처럼 따끈한 휴식을 하고 있다그가 먼 길을 가려고 몸을 풀고 있다그가 새로운 땅을 밟기 위해 어둠을 견디고 있다그가 지나가는 사람의 굽은 등을 본다그의 침묵이 적막에 차츰, 빨려든다 먼 길을 달리며 외로움에 푹, 젖은 일상들눕지 못하고 온종일 서서 차의 무게를 견디는 힘겨운 시간들불쌍하다순간, 그의 몸에 긁힌 깊은 상처가 되고 싶다 그를 자세히 보니 나도 자유의 바퀴가 되고 싶은나도 자유의 바퀴가 되어 실컷 달리며 울고 싶은나도 자유의 바퀴가 되어길 끝 어디론가 힘차게 굴러가고 싶은, 이 마음 바퀴가, 저 불쌍한 바퀴가 내일의 푸른 먼지가 되려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둠에게 뜨거운 여름을 잘 건너 왔다. 말하려고 눈을 깜빡인다. .. 2022. 9. 27.
신형주 시인 / 남편을 낳다 외 2편 신형주 시인 / 남편을 낳다 며칠 동안 집에 와 계시는 시어머니손주한테서 눈을 못 뗀다쟤는 어쩜 하는 짓이 제 아비를 빼다 박았냐태어날 때부터 붕어빵이더니 자랄수록 똑 닮아가네시금치, 오니 싫어하고 사골국 좋아하고깔끔 떨고잔소리하면 눈 치켜뜨고새끼발가락 휜 거 하고 어쩜 어쩜어이구 내 새끼야 감탄사 날리시며 입꼬리 올라가는 시어머니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외친다어머니 내 새끼거든요어쩌나난 이제까지 남편을 낳아서 키웠나보다 신형주 시인 / 히레사케 눈발 날리는 오후 다섯 시 버스 정류장지갑에서 명함 꺼낼 때 슬픔 한 장도 같이 툭,떨어지는 사내라면 먼저 다가가서 말 걸어보고 싶네 감히 실례하고 싶네 히레사케 한 잔 마시자 청하겠네 내 슬픔의 지느러미 몰래 그에게만 보여주고 싶네겨울밤 한가운데를 유영하며우리.. 2022. 9. 27.
양왕용 시인 / 나의 시(詩) 3 외 1편 양왕용 시인 / 나의 시(詩) 3 나의 시(詩)는할아버지 기침 소리에 묻어나오는소금기의 하얀 바람이다.육지(陸地)로 건어물(乾魚物) 장사를 떠났던당신의 젊은 시절그 바람은언제나 당신을 따라 나섰다.주막의 댓돌 위에서나시장(市場)의 복판에서나어쩌다가 바다에서돌개바람을 만나몸만 살아 남았던 때에도……주름살이 늘어난 얼굴로새벽에 집을 나서방울 소리와 함께소장수를 떠났던 시절에도저녁마다 대사립을 울린카랑카랑한 그 목소리.어느 해 겨울저녁 밥상을 물리고나직나직 지난 날을 회고하던그 목소리로동학란 속에서간간이 번쩍이는 그 바람이다.나의 시(詩)는당신의 등짐 속 건어물(乾魚物)이나소들이나주막의 호롱불에 섞여당신의 수염 밑으로 떨어지던그 바람이다.가벼이 가벼이아침마다 밥상머리에내려앉는소금기에 그 바람이다. 양왕용 시인.. 2022.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