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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15159

김경미 시인 / 청춘 외 2편 김경미 시인 / 청춘 없었을 거라고 짐작하겠지만 집 앞에서 다섯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린 남자가 제게도 있었답니다 데이트 끝내고 집에 바래다주면 집으로 들어간 척 옷 갈아입고 다른 남자 만나러 간 일이 제게도 있었답니다 죽어 버리겠다고 한 남자도 물론 죽여 버리고 싶은 남자도 믿기지 않겠지만 - 시집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김경미 시인 / 취급이라면 ​ ​ 죽은 사람 취급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 살아 있는 게 너무 재밌어서 아직도 빗속을 걷고 작약꽃을 바라봅니다 ​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잡지를 펼치니 행복 취급하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그 .. 2023. 5. 28.
김세현 시인 / 거미집 외 1편 김세현 시인 / 거미집 거미처럼 그는 허공에 집을 지었다 나는 땅이 튼튼해요 졸랐지만 그는 땅은 너무 낮아 믿을 수 없어 사람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지을 거야 나는 땅에 내려오라 자꾸 달랬지만 그는 뒷걸음치며 허공의 계단을 올라갔다 바람이 불어요 투창 같은 별들이 당신 몸에 박혀요 그가 지은 집은 투명유리처럼 빛을 뿜고 있었지만 허공에 떠 있는 집은 아무래도 무서워 덜덜 떨고 있는 나를 그는 따끈한 구들목에 앉혔지만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삐걱이는 집 창문이 날아다니고 비안개가 온 방을 적시고 발 딛는 자리마다 패인 구름 웅덩이 지상의 불빛에 흐린 눈물 글썽이는데 아! 나는 잠들지 못하고 달의 가슴에 화석처럼 박혀 있다 김세현 시인 / 몸이란 감옥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가 입으로 인터넷을.. 2023. 5. 27.
문철수 시인 / 냉이 외 3편 문철수 시인 / 냉이 냉이 꽃 핀다 수직으로 대지를 뚫는 뿌리 속에 뚝심을 세우는 중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여간 고집스럽지 않으면 유지하기 어려운 것 꽃을 피운다는 건 가슴에 질긴 심 하나 박는 일이다 문철수 시인 / 고추 허름한 모텔방을 베고 누워 뒤척거리다 씻고 나와 언양 언저리를 돌고 돌다 들어온 순댓국집 깍두기를 덜고 배추김치를 자르고 레시피 대로 추가 양념을 넣는다 국밥 한술 뜨고 고추 접시를 쳐다보는데 유독 고추 하나 신辛기 뿜고 있다 눈에 띄는 고녀석 집어 들고 된장 푹 찍어 절반을 뚝 끊는데 어째,마음 허리에 아련한 통증이 온다 양파를 베고 누운 고추 사이에서 유독 불거져 보였던 녀석 그렇게 타고났던 것인데 단지 눈에 띄는 겉모습 때문에 고집스런 천성 때문에 씹힌다 틀에 박힌 땅에서 자유스러.. 2023. 5. 27.
배재경 시인 / 석기 동무 배재경 시인 / 석기 동무 이른 봄비가 싸르륵 싸르륵 새어드는 밤 자꾸 석기 동무 생각난다 나보다 한 살 많았던 석기 동무 석기는 아랫집 5남매 중 막내이고 우리집은 누나 하나 나 하나 담장 하나로 얼굴 보며 석기야 노올자! 재복아 노올자! 나란히 토끼풀 뜯으며 놀다 논도랑에 새 고무신 한 짝씩 떠나보내고 단석산 그림자 황금으로 나리는 아래윗집에서 야단맞았지 석기가 소꼴 먹이러 가면 쫄래쫄래 내가 박시고개 솔잎 긁으로 가면 석기도 쫄래쫄래 석기 누나 우리 누나 밤낮없이 뭉쳐 나팔바지 멋 부리며 경주 시내 쏘다니고 우리집 골방에서 놀다 잠들고 놀다 잠들고 동네 누나들 중 유일하게 내 고추를 본 석기 누나 수리도랑 미꾸라지 잡다 엉망이 된 옷들을 풀어헤치고 누나들이 앞뒤로 밀어주는 때수건에 우리는 아프다 소.. 2023. 5. 27.
정일근 시인 / 너를 사랑하기 위해 외 2편 정일근 시인 / 너를 사랑하기 위해 때로는 침묵이 가장 아름다운 말이듯 때로는 두 눈을 감는 것이 가장 뜨겁게 보는 일이듯 너를 사랑하기 위해 혀를 잘라버린다 두 눈을 뽑아버린다 한 알 콩잎이 썩어 줄기를 밀어올리고 잎을 달아 콩 꽃 수북수북 일 듯이 너를 꽃피우기 위해 나를 땅 속 깊이 묻는다 정일근 시인 / 잔 시인이 앉아 시를 쓰는 밥상 위의 잔 바다로 가득 차 있는 둥근 물 잔 스스로 돌면서 노는 푸른 잔 떠났다가 마감 시간에 다시 돌아오는 잔 밤이면 웅크린 등 위로 별이 떠 반짝이는 잔 시인이 목이 마를 때 단숨에 마셔버리는 궁극의 잔, 그 잔 속 내가 있고 내 잔 속에 그 잔 놓여 있어 시인이 잠들지 못할 때 갈증 가득 차 있는 잔 비우고 나면 시가 그득하게 담겨 있는 빈 잔. 정일근 시인 /.. 2023. 5. 27.
한창옥 시인 / 풍요와 빈곤 한창옥 시인 / 풍요와 빈곤 폐기된 세상이 500개의 컨테이너에 실린다 고장 난 텔레비전. 오디오장비들이 산더미처럼 수출이라는 이름으로 지구의 반대 나이지리아로 향한다 ​ 주파수가 달라서 쓸모없는 것들은 지구 위 중력 없는 물체가 되어 구리를 찾아내기 위해 태워지는 불더미가 된다 생계로 굶주린 라고스의 아이들은 전자제품이 쓰레기더미에서 독하게 반항하는 수은. 납. 카드뮴의 검은 연기에 파묻혀 시커멓게 끄스른 얼굴에 어린 이빨이 하염없이 희다 ​ 장갑 없는 상처투성이의 작은 손은 구리. 알루미늄. 쇠붙이를 골라내는 보물상자다 세계인들은 편하게 쓰레기를 처리하고 재활용에 빈곤한 우리의 환경쇼윈도를 본다 수명을 다한 매립지는 쥐들의 왕국이 되어 밤낮 전염병을 되돌려 주는 신나는 놀이터 그렇게 수억 년의 푸른 .. 2023. 5. 27.
윤제림 시인 / 아름다움에 대하여 외 2편 윤제림 시인 / 아름다움에 대하여 내 심장을 꿰뚫을 수도 있었을, 화살 하나가 종잇장 하나를 매달고 장대(將臺) 기둥에 날아와 꽂혔다 적장의 편지였다 역관(譯官)을 불러 읽어보라 했다 수레바퀴만한 달이 성곽을 타고 넘어가는 봄밤이오 오늘도 나는 변복을 하고, 동서남북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 이제 막 저녁을 먹었다오 망루며 포대며 당최 치고 때릴 데가 없더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성에 이미 무릎을 꿇었소 날 밝으면, 성문 앞 팽나무 그늘에서 바둑이나 한 판 둡시다, 우리 내가 지면 조용히 물러가리다 혹여, 내가 그대를 이긴다면 어찌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성을 쌓을 수 있는지, 기술이나 두어 가지 일러주지 않겠소? 윤제림 시인 / 동백꽃 협상은 또 결렬된 모양이다 오늘도 북소리에, 일제히 투신. 동백꽃은 파업이 .. 2023. 5. 27.
김기덕 시인 / 사각의 알레고리 김기덕 시인 / 사각의 알레고리 모서리들이 각을 자랑한다 풍경의 시각이 못 박히며 만든 견고한 틀, 비틀린 각들은 서로 기대지 않았어도 인연으로 묶여있었다 뒤엉킨 의식은 붉은 카펫으로 깔리고, 그 위에서 눕고 잠자며 초라한 두 폭 초상화로 남은 철학자의 얼굴은 앙상했다 생각마저 죽어 사는 사각지대 성모의 표정을 닮은 낡은 탁자들이 햇살을 입고 담벼락의 경계를 벗어나고 있었다 빗물로 깨달은 이음새가 자신을 놓아주고 있었다 군상들은 지층의 프레임에 갇혀 흐느꼈지만, 장방형의 무덤에 누워 사각은 어둠보다 짙은 물감으로 풀어지기 시작했다 해체는 자신을 버림으로 도달한 유형이었다 시계를 벗어난 우주는 텅 비어 있고, 불꽃으로 태어난 얼굴들은 영원 속에 은광銀光으로 서있다 각은 각을 얻음으로 해탈했다 틀에 박힌 기.. 2023. 5. 27.
전순영 시인 / 통 전순영 시인 / 통 등과 배에 홍반이 여기저기 생기더니 가려워지더니 팔과 다리 할 것 없이 홍반은 대장과 소장 쓸개와 간 콩팥이 흘리는 눈물이 몸을 가르고 흙탕물처럼 쏟아졌다 기둥을 적시고 벽을 타고 넘어와 차오르더니 지붕을 무너뜨리고 말이 막혀버린 그는 말을 더듬고 뚫린 배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가슴에다 말뚝을 박아놓고 꼿꼿이 서서 스스로의 채찍에 피 흘리며 기우는 천년의 기둥을 붙들고, 어머니가 입에다 칼을 물었던 지난날을 어금니로 깨물어 삼키며 바다를 이루었다 미운 물고기도 예쁜 물고기도 없는 고래가 새우를 삼키지도 않는 물고기들은 헤엄치며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이복동생을 이인자로 세우고 쓰다듬으며 가슴에다 통을 심어 주었다 형이 흙에 묻히자 그 통을 길바닥에 깔아놓았다 왕과 백성이 노론.. 2023. 5. 27.
이상옥 시인 / 미켈란젤로 외 4편 이상옥 시인 / 미켈란젤로 당신은 어떻게 피에타 상이나 다비드 상 같은 훌륭한 조각상을 만들 수 있었습니까 당신은 정말 위대한 예술가에요 아니에요 신이 꼭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는 선물을 배달하는 심마니와 다를 바 없어요 숨어 있는 산삼을 찾아서 잔뿌리 하나도 다치지 않게 정성껏 파내듯이, 대리석 속에 숨어 있는 조각상을 정이나 쇠망치로 손상 없이 꺼내주었을 뿐이에요 나도 택배꾼일 뿐이에요 이상옥 시인 / 제물祭物 나는 생각한다 침대는 제단이고 나는 제물이라고 하루 온갖 오물로 탁한 의식 밤새 말갛게 가라앉아 맑디맑은 신새벽에 나는 가장 정결한 영혼 하늘에 바쳐져도 좋을 이상옥 시인 / 나무 나무 아래 누워 이파리들을 본다 푸르고 무성하게만 보이던 잎들 하나하나 온전한 게 없다 작은 구멍이며 바래지고 오그.. 2023. 5. 27.
강창민 시인 / 기도를 위한 시 외 3편 강창민 시인 / 기도를 위한 시 맘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기도가 무슨 소용 있으랴 강가에 홀로 떠 있는 고깃배 어부가 없으면 떠나지 못한다. 수초 속에서 낚시를 기다리는 은빛 물고기들 아침은 물살 위에 흘러가고 빈 배는 강둑 근처에서 서성거린다 기도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그 말이 무슨 소용 있으랴 배는 헛되이 맴돌다가 어둠 속에 묻힌다. 물 위로 걸어가는 이 보이지 않고 물 아래 그림자만 젖어 있다. 물안개 강을 덮어 저 건너편에 빛난 곳 다만 희미할 뿐 그대 안에 있지 않으면 말이나 기도가 무슨 소용 있으랴 말이나 기도 속에는 참 기쁨이 없으므로 무섭게 바람 불면 무섭고 생명줄 손끝에서 번번이 놓치리니 빈 배는 늘 비어 있고 어둠은 때맞추어 찾아올 뿐. 그대 안에 있지 않으면 배도, 어둠도 그저 풍경으.. 2023. 5. 27.
김기홍 시인 / 행복이란 외 1편 김기홍 시인 / 행복이란 스치는 것이라 해요 머물지 않는 것이라 해요 백날이 슬퍼도 이 단 하루가 그대와 나 나누는 순간을 소중히 간직한다면 아 사랑이여 우리 슬퍼하지 말아요 긴긴 겨울을 이겨내고 꽃이 피는 매화나무가 그대이거나 나는 이거나 단 한 순간을 아껴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만 있다면 비가 내려 그 빗물이 슬픔일지라도 나 당신을 만나 한 세상 잘 살면서 마음을 달래니 이 어려운 세상살이 견디어내는 이 슬픔이 보일지라도 나 삶이 고통이라 말하지 않겠네 나 그 그리움 나누는 그대가 있으니 산다는 것은 외롭지만은 않겠네 아 그것이 사랑이라 서로가 변함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좋을까 아 사랑이여 이제야 알았으니 마음을 얻었으니 삶의 고통이 있을지라도 언제나 어둠에 빛나는 별빛이 되어 영원함을 만들어 보아.. 2023. 5.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