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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진 시인 / 찬란한 사랑 외 1편 김윤진 시인 / 찬란한 사랑 냉혹한 세상에 한마음 줄 곳 있어 따뜻한 평온함은 여유로운 영혼으로 봄바람 따라 떠다닌다 불빛으로 반짝이는 숙명 같은 수면은 추억의 그림자도 삼켜버리고 그리움에 야윈 꽃은 허공을 부유하지만 그대에게 있어 쉼 없이 새로운 사랑으로 피어난다 참으로 오래 기다렸던 그대는 끝없는 인내를 요구하더니 엷은 미소를 머금고 어느덧 내 눈앞에 서 있는 사랑이어라 김윤진 시인 / 당신은 창백한 초록별 청수한 얼굴에 숨은 갈빛 그늘진 영혼의 바람 물안개 피어오르는 삶의 페이지로, 야트막한 담장 너머 맑은 숲 향기 쐬어 희석하려 합니다. 꿈결에서조차 혼절시킬 듯 당신의 눈부신 자태는 언덕빼기 하늘에 비출 창백한 초록별이었습니다. 세찬 사랑 노래의 소망 실어 진정, 변함없이 타오르는 활화산같은 불바.. 2023. 5. 30.
김지율 시인 / 팬더마임 외 2편 김지율 시인 / 팬더마임 ㅡ믿음의 형태 ​ ​ 서로 잘라내고 싶은 부분에 동그라미를 그려 주세요.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무표정한 눈과 마주친다 쏟아진 주스는 컵에서 멀고 오렌지 밖을 넘지 않는다 자국은 둥글고 바닥은 자국을 힘껏 밀어낸다 컵 하나를 슥슥 지운다 오렌지를 다른 컵에 담으면 컵은 컵의 방식으로 오렌지는 오렌지의 방식으로 쏟아진다 탁자를 뚫고 나온 얼룩처럼 필사적으로 눈을 파내자 검은 얼굴이 환해진다 컵 하나를 다시 세운다 가만히 두면 싹이 나는 감자처럼 잘못은 매일 닦아도 흘러넘쳐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음만 먹으면 믿음은 정말 믿음으로 완성되겠지만 ​​ 계간 『불교문예』 2023년 봄호 발표 김지율 시인 / 올란도 ​ 흰 손수건 안에서 꿈틀거리며 왼쪽 날개가 나왔다 유리를 닦자 오른쪽 .. 2023. 5. 30.
박서영 시인 / 눈사람의 봄날 외 3편 박서영 시인 / 눈사람의 봄날 이사 다닌 집들이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져버렸다 환한 벚꽃이 깨진 창문을 잠시 엿보다 가버리고 이후의 긴 그늘에 대해선 모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국도를 지나쳐, 지나쳐온 봄날이었다 길 고양이 한 마리처럼 도시 외곽에서 달을 분양 받았지만 나의 열망은 달과 태양을 제본하는 것 한겨울에 만든 눈사람을 한여름에도 들여다보는 것 태양의 밀짚모자를 쓴 채 달의 털모자를 쓴 채 태양과 달은 서로의 표정을 사각사각 베어 먹고 있다 그러나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는 뜨겁고 차가운 두 얼굴은 그냥 놔두시길, 괜한 관심으로 눈썹과 코와 입술을 그려 넣지 마시길, 지금은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집에 들어가 그 해의 환했던 벚꽃과 어느 여름밤의 뜨거운 포옹과 술렁이는 꽃그늘 따위를 모두 들고 .. 2023. 5. 30.
선정주 시인 / 겨울 사유상(思惟像) 외 2편 선정주 시인 / 겨울 사유상(思惟像) 겨울나무를 대하며 冬眠한다고 하였나 입가엔가 눈가엔가 미소는 띠지 않았을 뿐 찬바람 혹한을 견디며 깊은 思惟에 든 것을 한 소식을 들었다 함은 참 안이한 解法이다 엄동의 눈바람이 에이고 파고들수록 表皮가 감싸고 감싸 응결이 되는 思惟 이다지 越冬이 길어 숨이 얼어붙을 것 같네 아무도 손 내밀어 체온을 나누지 않고 혼자서 하늘을 바라며 産日을 채우는 나무. -새시대시조 2006년 여름호 선정주 시인 / 손질 추위를 견디게 한 투박한 한 벌 겨울 옷 내 육신만이 아닌 목숨을 지킨 것이니 어쩌면 배어있는 체취 혼백이라 아니 하리. 시련의 날에 정인도 변하여 떠났지만 허물없이 파고 든 혼연일체였던 장막 날 받아 정히 손질하여 고향처럼 보리라. 선정주 시인 / 겨울 중량천 1.. 2023. 5. 30.
김선태 시인 / 되새 떼 외 9편 김선태 시인 / 되새 떼 ​ ​되새 떼 수십만 마리가 저녁 무렵 화폭 위에 수묵 산수를 치고 있다 ​ 자기들끼리 한 자루 붓이 되어 거대한 산을 그리고 산을 지운다 산은 동산(動山)이고 동산(動産)이다 ​ 화폭 속으로 검은 해일이 몰려온다 폭풍노도의 붓끝은 거대한 용틀임으로 허공을 구부렸다 허공으로 솟구친다 ​ 일사분란! ​ 단 한 획도 삐져나가거나 막힘이 없다 단 한 순간도 한눈팔거나 주저함이 없다 ​ 일필휘지! ​ 되새 떼 수십만 마리가 수묵 산수 위에 초서로 시를 휘갈기고 있다 ​​ 월간 『현대시』 2021년 2월호 발표 ​ 김선태 시인 / 내 속에 파란만장 ​ 내 속에 파란만장의 바다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썰물이 지네 썰물이 지면 바다는 마음 밖으로 달아나 질펀한 폐허의 뻘밭 적나라하네 상처가 .. 2023. 5. 30.
고창환 시인 / 낙타의 길 외 4편 고창환 시인 / 낙타의 길 거기에선 아주 느리게 걷자 모래 바람 비껴갈 때 꿈벅거리는 눈 감았다 뜨면 보이리 사는 것이 이렇게 흠집투성이구나 먼 하늘 별들이 돋으면 오래 멈춰 서서 생각 깊게 바라보자 너덜거리는 시간이 긴 그림자를 끌며 지나도 가뭇없이 멀어지는 것들을 꿈꾸지 말자 사는 것이 모래 벌판에 길을 다지는 일이지 보이는 것이 모두 마음의 굴절이었구나 함부로 흘러나간 삶을 거짓처럼 사라진 물길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거기에선 아주 느리게 걷자 마른 나무 그늘 목을 축일 때면 짓물러진 발자국이라도 가만히 짚어보자 고창환 시인 / 오월 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이 부시다 잎이 넓은 나무들 세상의 그늘을 가려주지 못하고 나지막이 엎드린 가난 위에서도 반짝거리는 나뭇잎 착한 이웃들의 웃음처럼 환한 잇몸을 드.. 2023. 5. 29.
김백겸 시인 / 불타지 않는 배 외 2편 김백겸 시인 / 불타지 않는 배 ㅡ피라미드 몽상 하늘의 문을 열어 시리우스 은하의 영원으로 가기 위한 차원이동장치-기자(gija)의 피라미드 태양의 아들 파라오들은 공간에 돌을 쌓아 시간을 가두어 두고자 했다지 얼음을 저장한 석빙고처럼 죽은 자의 일생을 방부 처리해 부활의 때에 시간을 톱으로 썰어 사용하고자 했다지 고대 이집트인들이 불타지 않는 배-피라미드에 몸을 실어 먼 시간의 대양을 건너가고자 했던 불사 환상이 참혹하구나 얼어붙은 시간이 녹아 왕들의 미이라에 피가 돌고 살이 채워지면 하늘의 문이 열리며 생명이 시작한-최초의 하늘로 돌아가는 마법 환상에 중독된 늙은 학인의 호기심이 고대 인도의 소마주를 먹고 가시광선과 가청주파수에 갇혀 있는 감각의 감옥을 열어 보고 싶구나 모세 지팡이가 가른 홍해 바닷.. 2023. 5. 29.
박덕규 시인 / 낙하산 외 2편 박덕규 시인 / 낙하산 1 몇 포기 잡풀 붙잡고 그림같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지만 단 한 줄의 깜장 크레용으로 나는 지워지고, 그리고 다시 나타나 보일 때까지 박쥐처럼 숨어 지내기만 하였다. 한 걸음씩 봄밤은 짙어 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꽃이 피고 번져 갔다. 4월과 5월의 잠자는 병동 쪽으로 혈압이 급격히 기울어졌다. 2 저지대에 살면서 불어댄 풍선, 바람 앞에 나서면 하늘로 치솟아 가던 우리의 횡경막은 얼마나 부풀까. 만유인력과 낙하 운동을 배우던 시절 측정할 수 없는 한계 밖의 공간에서부터 초가지붕 위로 아파트 옥상 위로 떨어뜨려진 돌멩이같이 가장 자유로운 곳이라던 무중력에서도 뻥뻥뻥 풍선에 구멍이 뚫려서 단 한 줄의 깜장 크레용으로 나는 지워지고 다시 하늘 끝을 어떤 색깔로 그려 놓을까. 우리의 꿈.. 2023. 5. 29.
황지우 시인 / 묵념, 5분 27초 외 1편 황지우 시인 / 묵념, 5분 27초 1. 이 시를 만나면서 강은교 시인이 어느 문학칼럼 쓴 호소문이 번뜩 뇌리를 스친다. “ 시인이여, 어서 떠나라. 아직도 거기 머물고 있는가. 옛집은 틀이며 진부함이며 상투성이다” 그러하다면 도대체 시란 황지우에게 있어서 무엇일까? 그는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라는 시를 통해 독자들에게 실험적인 설문의 도움을 청한다. 그는 시를 “지금 이 시대에 대한, 지금 이 시대를 위한, 지금 이 시대의 유언(遺言)”으로 쓴다고 진술한다. 그 진술이 “오만인가? 당당한가? 위험천만한가? 아니면 천진난만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기발한 작시법이지만 전위적이지 않는가? 필자는 택일을 할 수 없어 고민 끝에 ‘ 당당한 오만함’으로 설문지 여벽에 주기(朱記)하고 만다. 틀, 진부함과 .. 2023. 5. 29.
김길나 시인 / 분실 외 2편 김길나 시인 / 분실 집에서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진다 처음에 목걸이가 사라지고 그 다음엔 안경이 없어지더니 얼마 전에는 바지가 도망가 버렸다 가출이 아님에도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오른손과 왼손이 멀다 한 손은 감추고 한 손은 찾는다 나는 나를 감추고 물건을 감추고 중요한 약속을 감춘다 바지가 나를 감추고 있었으나 감춘 것이 드러나자 바지가 없어졌다. 나는 노출을 감추기 위해 나를 가둔다 평행하는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서로 멀다 한 눈은 찾고 한 눈은 기억을 잠근다 점점 멀어져가는 두 귀집 사이에 안경다리가 걸리지 않는다 하릴없는 안경이 잠적해버렸다 분실물에서 오는 메시지가 귀집으로는 들어오지 않으므로 찾는 일이 더 난감해진다 분실물 찾는 일이 일상이 된 나는 막상 분실물을 만나면 헛보고 그냥 지.. 2023. 5. 29.
김언 시인 / 빅뱅 외 2편 김언 시인 / 빅뱅 ​ 시간이 차곡차곡 채워져서 폭탄에 이른다 일 초는 일만 년의 폭발 순간은 영원을 뇌관으로 타들어 가는 심지 태아는 울고 태어나는 순간 거꾸로 매달린 세계를 고통스럽게 입에 담는다 보지 않는 세계의 보이지 않는 웅성거림과 차가운 열기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대기 죽음으로 대변되는 이 검은 색조의 밝은 별을 눈에 담기 위하여 잔해 위에 잔해를 쌓아 올리는 아이는 운다 출발은 멀었고 이미 도착한 이 세계에서 물결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암흑에 다다를까 방금 전까지 잠잠하던 폭발이 한 점도 너무 넓은 세계를 흔들어 깨웠다 내가 돌아다녀야 할 곳이 아직도 남았다고 믿는 그 세계를 아이 혼자 담겨서 운다 무덤은 멀었고 이미 도착한 요람에서 _시집 에서 김언 시인 / 어쩌다가 .. 2023. 5. 29.
주영헌 시인 / 송곳 외 2편 주영헌 시인 / 송곳 빈 몸에 취기로 둥지를 튼 새벽 몸 안이 절절 끓고 있다 거미처럼 천장으로 기어 올라간 그림자가 투명한 집을 짓는 새벽이 터져 환한 아침 순서를 앞지른 아이가 내 옆에서 거꾸로 자고 있다 추위를 쫓고 덮어준 이불 사이로 손가락이 뾰족하다 검게 때가 낀 손톱 아이의 손톱을 깎아 줄 때가 되었다 겪어 나가는 모든 일은 다 깰 때가 있다 어느 지점을 봉합한 아이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일 잠시 시들었던 아이의 몸에선 시든 꽃잎들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말들이 의사의 입에서 옮겨지고 있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놀다 온 두 손 억세게 철봉을 잡았던 손가락도 기진한 듯 아비의 손가락 마디 하나를 잡지 못하고 있다 병실이 놀이터라도 되는 듯 손톱 사이엔 .. 2023. 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