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오규원 시인 / 우리 시대의 순수시(純粹詩)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0. 5. 12. 05:00

오규원 시인 / 우리 시대의 순수시(純粹詩)

 

 

1

 

밤 사이, 그래 대문들도 안녕하구나

도로도, 도로를 달리는 차들도

차의 바퀴도, 차 안의 의자도

광화문(光化門)도 덕수궁도 안녕하구나

 

어째서 그러나 안녕한 것이 이토록 나의 눈에는 생소하냐

어째서 안녕한 것이 이다지도 나의 눈에는 우스꽝스런 풍경이냐

문화사적(文化史的)으로 본다면 안녕과 안녕 사이로 흐르는

저것은 보수주의(保守主義)의 징그러운 미소인데

 

안녕한 벽, 안녕한 뜰, 안녕한 문짝

그것 말고도 안녕한 창문, 안녕한 창문 사이로 언뜻 보여주고 가는 안녕한 성희(性戱)……

어째서 이토록 다들 안녕한 것이 나에게는 생소하냐

 

2

 

진리란, 하고 누가 점잖게 말한다

믿음이란, 하고 또 누가 점잖게 말한다

진리가, 믿음이 그렇게 점잖게 말해질 수 있다면

아, 나는 하품을 하겠다

세상(世上)엔 어차피 별일 없을 테니까

 

16세기나 17세기 또는 그런 세기에 내가 살았다면

나는 그 말에 얼마나 감동했을 것인가

 

청진동(淸進洞)도, 그래 밤 사이 안녕하구나

안녕한 건 안녕하지만 아무래도 이 안녕은 냄새가 이상하고

나는 나의 옷이 무겁다 나는

나의 옷에 묻은 먼지까지 무게를 느낀다.

점잖게 말하는 점잖은 사람이

입 속의 냄새와

아침마다 하는 양치질의 무게와 양치질한

치약의 양의 무게까지 무게를 느낀다

 

이 무게는 안녕의 무게이다 그리고

이 무게는 안녕이 독점한 시간의 무게

미래가 이 지상(地上)에 있었다면 미래 또한

어느 친구가 독점했을 것을

이 무게는 미래가 이 지상(地上)에 없음을 말하는 무게

그러니까 이건 괜찮은 일―

어차피 이 곳에 없으니 내가 또는

당신이 미래인들 모두 모순이 아니다

 

그대 잠깐 발을 멈추고, 그대 잠깐

사전을 찾아보라 보수주의(保守主義)란

현상을 그대로 보전하여 지키려는 주의(主義)

그대 잠깐 발을 멈추고, 그대 잠깐

사전을 찾아보라 아침의 무덤이 무슨 말 속에 누워 있는지

 

말이 되든 안되든 노래가 되든

안되든 중요한 것은 진리라든지 믿음이라는

말의 옷을 벗기는 일

벗긴 옷까지 다시 벗기는 일

나는 나의 믿음이 무겁다

 

정말이다 우리는 아직도 패배(敗北)를 승리로 굳게 읽는 방법을

믿음이라 부른다 왜 패배(敗北)를

패배(敗北)로 읽으면 안되는지 누가

나에게 이야기 좀 해주었으면

그 믿음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여,

나에게 화를 내시라

불쌍한 내가 혹 당신을 위로하게 될 터이니까

 

3

 

어둠 속에 오래 사니 어둠이 어둠으로 어둠을 밝히네. 바보, 그게 아침인 줄 모르고.

바보, 그게 저녁인 줄 모르고.

 

진리는 진리에게 보내고

믿음은 믿음에게 안녕은

안녕에게 보내고 내가 여기 서 있다

 

약속이라든지 또는 기다림이라든지 하는 그런 이름으로

여기 이 곳의 주민인 우편함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비어서 안이 가득하다

보내준다고 약속한 사람의 약속은

오랫동안, 단지 오랫동안 기다림의 이름으로 그곳에 가득하고

 

보내고 안 보내는 건 그 사람의 자유니까

남은 것은 우편함 또는 기다림과 나의 기다림

또는 기다리지 않음의 자유

거리에는 바람이 바람을 떠나 불고

자세히 보면 나를 떠난 나도 그 곳에 서 있다

유럽의 순수시(純粹詩)란 생각컨대 말라르메나

발레리라기보다 프랑스의 행복 수첩(手帖)

말라르메는 말라르메에게 보내고 나는 청진동(淸進洞)에 서서

 

발레리는 발레리에게 보내고

나는 청진동(淸進洞)에 서서

우리나라에게 순수시(純粹詩), 순수시(純粹詩) 하고

환장하는 이 시대의 한 거리에 내가 서서

 

4

 

비가 온다. 오는 비는 와도

오는 도중에 오기를 포기한 비도

비의 이름으로 함께 온다.

비가 온다. 오는 비는 와도

청진동(淸進洞)도, 청진동(淸進洞)의 해장국집도 안녕하고

서울도 안녕하다.

 

안녕을 그리워하는 안녕과 안녕을 그리워했던 안녕과 영원히 안녕을 다시 그리워할 안녕과, 그리고 다시 안녕을 그리워하는 안녕과 안녕을 다시 그리워할 안녕이 가득 찬 거리는 안녕 때문에 붐빈다. 그렇지, 나도 인사를 해야지. 안녕이여, 안녕 보수주의(保守主義)여 현상유지주의여, 밤 사이 안녕, 안녕.

 

여관에서 자고 해장국집 의자에 기대앉아

이제 막 아침을 끝낸

이 노골적으로 안녕한 안녕의 무게가

비가 오니 비를 떠나 모두 저희들끼리 젖는데

나는 나와 함께 아니 젖고

안녕의 무게와 함께 젖는구나.

그래, 인사를 하자. 안녕이여

안녕, 빌어먹을 보수주의여, 안녕.

 

이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문학과지성사, 1981

 

 


 

 

오규원 시인 / 원피스

 

 

여자가 간다 비유는 낡아도

낡을 수 없는 생(生)처럼 원피스를 입고

여자가 간다 옷 사이로 간다

밑에도 입고 TV광고에 나오는

논노가 간다 가고 난 자리는

한 물물(物物)이 지워지고 혼자 남은

땅이 온몸으로 부푼다 뱅뱅이

간다 뿅뿅이 간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르는 땅을 제자리로 내리며

길표양말이 간다 아랫도리가

아랫도리와 같이 간다

윗도리가 흔들 간다 차가 식식대며

간다 빈혈성 오후가 말갛게 깔리고

여자가 간다 그 사이를 헤집고 원피스를 입고

낡은 비유처럼

 

사랑의 감옥, 문학과지성사, 1991

 

 


 

 

오규원 시인 / 이 시대의 순수시(純粹詩)

 

 

자유에 관해서라면 나는 칸트주의자(主義者)입니다. 아시겠지만, 서로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나의 자유를 확장하는, 남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몰래(이 점이 중요합니다) 나의 자유를 확장하는 방법을 나는 사랑합니다. 세상(世上)의 모든 것을 얻게 하는 사랑, 그 사랑의 이름으로.

 

내가 이렇게 자유를 사랑하므로, 세상(世上)의 모든 자유도 나의 품속에서 나를 사랑합니다. 사랑으로 얻은 나의 자유. 나는 사랑을 많이 했으므로 참 많은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주 주택복권을 사는 자유(自由), 주택복권에 미래를 거는 자유(自由), 금주의 운세(運勢)를 믿는 자유(自由). 운세(運勢)가 나쁘면 안 믿는 자유(自由), 사기를 치고는 술 먹는 자유(自由), 술 먹고 웃어버리는 자유(自由), 오입하고 빨리 잊어버리는 자유(自由).

 

나의 사랑스런 자유(自由)는 종류도 많습니다. 걸어다니는 자유(自由), 앉아다니는 자유(自由)(택시 타고 말입니다), 월급 도둑질하는 자유(自由), 월급 도둑질 상사들 모르게 하는 자유(自由). 들키면 뒤에서 욕질하는 자유(自由), 술로 적당히 하는 자유(自由). 지각 안 하고 출세 좀 해볼까 하고 봉급 봉투 털어 기세좋게 택시 타고 출근하는 자유(自由), 찰칵찰칵 택시 요금이 오를 때마다 택시 탄 것을 후회하는 자유(自由). 그리고 점심 시간에는 남은 몇 개의 동전으로 늠름하게 라면을 먹을 수밖에 없는 자유(自由).

 

이 세상(世上)은 나의 자유(自由)투성이입니다. 사랑이란 말을 팔아서 공순이의 옷을 벗기는 자유(自由), 시대라는 말을 팔아서 여대생의 옷을 벗기는 자유(自由), 꿈을 팔아서 편안을 사는 자유(自由), 편한 것이 좋아 편한 것을 좋아하는 자유(自由), 쓴 것보다 달콤한 게 역시 달콤한 자유(自由), 쓴 것도 커피 정도면 알맞게 맛있는 맛의 자유(自由).

 

세상(世上)에는 사랑스런 자유(自由)가 참 많습니다. 당신도 혹 자유(自由)를 사랑하신다면 좀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밖에는 비가 옵니다.

이 시대의 순수시(純粹詩)가 음흉하게 불순(不純)해지듯

우리의 장난, 우리의 언어가 음흉하게 불순(不純)해지듯

저 음흉함이 드러나는 의미의 미망(迷妄), 무의미한 순결(純潔)의 몸뚱이, 비의 몸뚱이들…

조심하시기를

무식하지도 못한 저 수많은 순결(純潔)의 몸뚱이들.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오규원 시인 /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이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문학과지성사, 1981

 

 


 

 

오규원 시인 / 이토록 밝은 나날

 

 

□ 돈황

 

꿈꾸고, 욕망하고, 욕망의 굴을 파고, 환상을 보고

깎고, 다듬고, 색칠하고, 허물고, 깎고, 다듬고, 색칠하고

 

다시 꿈꾸고, 욕망하고, 욕망의 굴을 파고, 허물고, 파고

굴 속에 들어앉아, 외치고, 부르짖고, 통곡하고,

흩어진 환상을 불러모으고, 깎고, 다듬고, 허물고, 다시 깎는

 

저기, 저 길 건너 아파트 대단지의 검은 구멍 속의

산(山) 1번지(番地)의 한없이 넓은 구멍 속의

우리집 어두운 구석구석의

잎진 나뭇가지가 위로 위로 파고 있는 흐린 하늘 속의

저 돈황의 석굴

저 천불동(千佛洞)

서울의 명사산(鳴沙山)에는 모래처럼 눈발이 무너져내리고

 

□ 공룡

 

별이 빛나지 않는 밤 내가 사는

중생대(中生代)의 신길동 아파트 단지에

공룡이 찾아온다 너의

단지에도 가리라 온몸에

철갑을 두르고 등에 삼각형

골판을 좌우로 두 줄이나 꽂은

검룡 스테고사우루스의 몸뚱이가

동편 5단지를 지날 때면 중생대(中生代)

쥐라기(紀)의 가장 거대한 뇌룡

브론토사우루스가 30톤의 몸을 끌고

6단지 입구로 들어선다

문을 걸어잠근 주민들은 이제

곧 끝날 쥐라기(紀) 마지막 몇 밤의

베란다에 불을 밝히고

흐려지는 한 세기의 창을 닦는다

뇌는 작고 몸집만 비대하게 하는

뇌하수체만 발달한

이 지상에서 며칠 후면 사멸할

거구 파충류의 포효 소리를 듣는다

서편 6단지는 그들이 멸종할 순간까지

보안등만 외롭게 밝히리라

내가 외롭게 밝히리라

몸이 무거워 작은 머리조차 들기 힘든

스테고사우루스의 등줄기 골판을

주민들은 쥐라기(紀)의 유품으로

아파트의 잔디밭에 놓고 싶어한다

곧 쥐라기(紀)는 끝나리라 이어

중생대(中生代)의 마지막이어야 하는

그러나 믿을 길 없는 백악기(白堊紀)가 닥치리라

쥐라기(紀)의 땅에서나 살 수 있는

브론토사우루스여

별이 빛나지 않는 밤의 어둠을

끄악 끄악 꼬리로 휘젓는 공룡이여

 

□ 달과 어둠

 

진도개 암놈이 코를 끙끙거리며 앞서간다

진도개 수놈이 뒷짐을 지고 따라간다

잡종들이 엉거주춤 따라간다

숲에서 인동초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가 잡종의 다리에 밟힌다

 

구례 화엄사 입구

잡종 하나가 뒤에 오는 잡종의 눈치를 본다

잡종 둘이 앞서가는 잡종의 눈치를 본다

잡종 하나 무조건 앞선 잡종의 엉덩이에 바싹 붙는다

 

구례 화엄사를 끼고 흐르는 개울물에

보름달이 옷 벗고 들어가 놀고 있다

활구하천득(活句下薦得) 둥둥 색지공(色之空) 공지색(空之色) 둥둥

 

진도개 암놈이 옷을 벗을 줄 몰라 뒤돌아본다

진도개 수놈이 단추를 풀 줄 몰라 뒤돌아본다

잡종들이 무슨 일인지 몰라 뒤돌아볼 때

 

둥둥 떠다니는 놀이 뒤로 밀려나 있던

구례 화엄사의 뒷산 어둠이

활구(活句)로 왈칵 몰려온다

 

□ 태양과 별

 

명동에서 나는

엊저녁에 꿈꾸었던

닭 한 마리를 보았다

엉성한 합판 손수레

바퀴 아래서 눈을 멀뚱거리며

나를 모르는 눈치였다

명동에서 나는

엊저녁 꿈꾸었던

귀부인을 보았다

실크 원피스를 입고

삼각뿔 모양의 상아 귀걸이를 하고

구두상점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엊저녁엔 닭을 안고

나를 달 속으로 안내했는데

오늘은 모르는 체했다

엊저녁 꿈꾸었던

사람들 다리 사이로 굴러다니던

쌍둥이 태양도 보았다

태양이 보였으니 이제 곧 밤이 오리라

그리고 아침이라는 이름의

쌍둥이 별이

서편에서 지리라

내가 어제 꿈꾸지 않았다면

오늘 저것들은

무슨 모양으로 저기 섰을까

 

□ 신생대(新生代)

 

다른 비가 오기는 오리라

비를 맞으며 담장 밑에서 풀들이

코와 눈이, 입과 귀가 서로

다른 비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떨어지는 비를 탁탁 튕겨내며

기다리고 있다 흙 속에서

이마를 드러낸 작은 돌과

깡통의 좌우 모서리도

지금을 탁탁 튕겨내고 있다

다른 비가 오기는 오리라

지금 그들과 내가 함께 맞는

이 비가 아닌 비가, 눈과 귀가 기다리는

등과 배가 기다리는 비가

빗줄기 사이 바람 오듯 오기는 오리라

그러나 고생대 페름기의 양서류가 기다렸던

중생대 쥐라기의 괴조가 기다렸던

우리들 신생대의 자작나무가 기다리고 있는

비가 키가 자꾸 자라는 우리들 자작나무의

비가 오기는 오리라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오규원(吳圭原, 1941~2007) 시인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출생. 본명은 규옥(圭沃)이고,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 1 ·2 등과 시선집 『한 잎의 여자』 그리고  유고시집 『두두』가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시작법』이 있음.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2007년 65세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