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윤강로 시인 / 무제無題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0. 12. 05:00

윤강로 시인 / 무제無題

 

 

팔랑팔랑 옷깃 날린다

퍼질러 앉아서 마냥 있어도 괜찮은,

별일 없는 일상 속 무채색의 편안함,

그런 어투의 사람,

꽃잎이라면 그냥 흩날림

스쳐 지나가서 금방 잊을 수 있는 체온의

소문없는 풍속도

비켜가면서 사는 변두리의 바람소리

목숨의 원형으로 바람부는

토속어의 사투리

옷깃 날리는 시간 속

별 뜻이 없어서 소박한

바람 소리가 남겨져 있으면 좋겠다

 

《시와소금》 2021. 여름호

 

 


 

 

윤강로 시인 / 헌 구두 닦아 신고

 

 

헌 구두 비까번쩍 닦아 신고

거리에 나서니

폭죽 터지는 소리

햇살이 바스러져

햇빛의 햇빛이 되고

숱한 열망이 갈라져서

우르르 쏟아지는

내 허공 어딘가의 눈부신 비산(飛散)

속 빈 소리래도 좋아

신나는 단말마의 상쾌한 연속음

헌 구두 신고 산다는 것

낡아서 따뜻하게 축제를 꿈꾼다는 것

부딪칠 적마다 피빛 아픔이 튀는

내 발가락의 동반자

먼 거리를 걸어온 헌 구두

일상의 축제같은 행보가 눈물겹다는 것

깊은 곳에서 팡팡 터지는 폭죽 소리

마음이 뜨거워진다

절망에 익숙해진 헌 구두 신고 걸으면

숨차지 않게 뒤처진 삶의

속도가 달구어진다

 

 


 

윤강로(尹崗老) 시인

1938년 중국 길림에서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1976년 《심상》으로 등단(박목월, 박남수, 김종길 심사). 시집으로 『불꽃놀이』, 『피피피 새가 운다』, 『비어있음의 풍경』, 『별똥 전쟁』, 『사람마다 가슴에 바람이 분다』, 『작은 것들에 대하여』 등이 있음.  2011년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수상. 현재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 보성고등학교 교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