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찬일 시인 / 첫사랑의 뒷모습 외 1편
임찬일 시인 / 첫사랑의 뒷모습
비슥히 때리거나 물집으로 잡혀드는 뽀얀 차 창 저 바깥면의 즐거운 빗방울을 이제는 이해하고자 타이르듯 말한다
무엇을 가르키던 손가락 한 개 뽑아 습기 찬 마음에다 글씨를 쓰고 싶다 세상에 고치지 못할 병 하나를 얻었을까
바람의 혼을 맞아 기쁘게 우는 사연 자꾸만 보태어도 늘지 않는 삶의 연습 나 하나 쓰러뜨리던 부드러운 상처여
바람의 혼을 맞아 기쁘게 우는 사연 자꾸만 보태어도 늘지 않는 삶의 연습 나 하나 쓰러뜨리던 부드러운 상처여
누가 또 내 이름을 숨어서 부르는가 위태로운 몸짓으로 떠오르는 슬픈 예감 더운 피 아프게 흘러 차라리 눈을 감고
새로 살이 돋는 이 놀라운 안심 속에 저 혼자 줄을 매고 빈 그네로 흔들리는 그래도 지우지 못한 서투른 글씨 한 줄
임찬일 시인 / 단풍잎
오후에 딸아이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퇴근할 때 잊지 말고 단풍잎 좀 주워 오라고 내일 숙제란다 참 아름다운 가을 숙제도 다 있구나 사랑이란 명령보다 무서운 것 나는 회사 주변을 한 바퀴 맴돈다 고추잠자리처럼 노란 색종이로 꾸며 놓은 듯한 은행잎이 딸아이가 좀 더 어릴 적 다니던 유치원 풍경 같다 이제는 일 학년 아직 책가방도 이기기 힘든 꼬마이지만 세상은 시작되었다 분량많은 숙제처럼 퇴근 버스에서 내려 건널목 앞에 서면 교회의 환한 불빛에 물든 가을 나무들이 고요하게 서서 기도하고 있다 딸아이는 도화지에다 감나무 잎도 붙이고 그 밑에 한두 줄 설명을 달아 놓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단풍잎을 꺼내어 준다 문방구에서도 살 수 없는 이 작은 이파리가 딸아이에게는 색종이보다 더 좋은 모양이다 너는 숙제지만 나는 사랑이란다 단풍잎을 도화지에 붙이면서 딸아이의 예쁜 손도 함께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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