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임찬일 시인 / 첫사랑의 뒷모습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0. 14. 05:00

임찬일 시인 / 첫사랑의 뒷모습

 

 

비슥히 때리거나 물집으로 잡혀드는

뽀얀 차 창 저 바깥면의 즐거운 빗방울을

이제는 이해하고자 타이르듯 말한다

 

무엇을 가르키던 손가락 한 개 뽑아

습기 찬 마음에다 글씨를 쓰고 싶다

세상에 고치지 못할 병 하나를 얻었을까

 

바람의 혼을 맞아 기쁘게 우는 사연

자꾸만 보태어도 늘지 않는 삶의 연습

나 하나 쓰러뜨리던 부드러운 상처여

 

바람의 혼을 맞아 기쁘게 우는 사연

자꾸만 보태어도 늘지 않는 삶의 연습

나 하나 쓰러뜨리던 부드러운 상처여

 

누가 또 내 이름을 숨어서 부르는가

위태로운 몸짓으로 떠오르는 슬픈 예감

더운 피 아프게 흘러 차라리 눈을 감고

 

새로 살이 돋는 이 놀라운 안심 속에

저 혼자 줄을 매고 빈 그네로 흔들리는

그래도 지우지 못한 서투른 글씨 한 줄

 

 


 

 

임찬일 시인 / 단풍잎

 

 

오후에 딸아이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퇴근할 때 잊지 말고 단풍잎 좀 주워 오라고

내일 숙제란다 참 아름다운 가을 숙제도 다 있구나

사랑이란 명령보다 무서운 것

나는 회사 주변을 한 바퀴 맴돈다 고추잠자리처럼

노란 색종이로 꾸며 놓은 듯한 은행잎이

딸아이가 좀 더 어릴 적 다니던 유치원 풍경 같다

이제는 일 학년 아직 책가방도 이기기 힘든 꼬마이지만

세상은 시작되었다 분량많은 숙제처럼

퇴근 버스에서 내려 건널목 앞에 서면

교회의 환한 불빛에 물든 가을 나무들이

고요하게 서서 기도하고 있다

딸아이는 도화지에다 감나무 잎도 붙이고

그 밑에 한두 줄 설명을 달아 놓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단풍잎을 꺼내어 준다

문방구에서도 살 수 없는 이 작은 이파리가

딸아이에게는 색종이보다 더 좋은 모양이다

너는 숙제지만 나는 사랑이란다

단풍잎을 도화지에 붙이면서

딸아이의 예쁜 손도 함께 붙였다

 

 


 

임찬일(林燦日) 시인(1955~2001)

1955년 전남 나주에서 출생. 雅號는: 南雨, 1983년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월간 문학》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1996년 《세계일보》 시부문 당선, 같은 해에 중앙일보 시조백일장 장원으로 당선. 저서로는 시집으로 『알고말고 네 얼굴』과 『못다한 말 있네』,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오면 난 그쪽 하늘부터 바라본다』와 『내게로 온것들은 눈이 슬퍼라』 그리고  장편소설 『임제』. 현대자동차써비스에서 15년간 기획 홍보업무 담당. 간암으로 47세로 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