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허순위 시인 / 달팽이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0. 20. 05:00

허순위 시인 / 달팽이

 

 

상추 천 원어치에 딸려 온 달팽이

하루 종일 아이들의 유리병 주둥이를 돈다

둘러앉은 눈 여섯 개가 신기한 양 구경하는

유리시장 속 눅눅한 생명이다

사과 껍질도 찢어진 풀잎쪽도 없어

쉴 자리도 일자리도 없는 달팽이

유리 주둥이 그 빙판길을,

뼈없는 하류의 몸이 고난대로 제 몸을 만든다

 

 


 

 

허순위 시인 / 그 길은 푸른 발자국만 뜯어먹는다

 

 

외발로 멈추어 선 저녁 계단.

발바닥 밑으로 중력이 바뀌어간다.

집으로 가는 길이란 말

누군가 공중에 흩뿌려 놓은 포플러 잎사귀들같이

푸들거리는 슬픔과 불안의 공기를 뚫고 멀리

아득하다. 맡은 역의 대사는 아직 못 다 외웠지만,

기나긴 저녁을 두른 내 옷은 툭, 툭 끌러 터진다.

계단 밖의 남자가 운다 못을 박으며

계단 안의 여자가 운다 못을 뽑으며

노란 현기의 즙 발린 이마에

뜨는 햇살마다 조금씩 묻은 피를 훔치고

집으로 가는 길.

부글거리는 거품의 계단에 서서

시계 속에 나른하게 흐르는

어둠의 시침, 배반의 분침 그리고 상실의 초침…

낀 먼지 뽀얗게 떠들어대는

저녁이 긴 창의 집에 돌아가고 싶다.

조금 조금 조석으로 갈아쓰는 안경과 안경 사이

부푸는 시력의 차이만큼

사물의 가장자리 둥글게 휘어지는

안개의 매듭을 풀어 나아가자면

지키지 못한 내 생애의 약속들

계단마다 벽처럼 우뚝우뚝 치솟아 오르지만

집으로 가는 길

그 길은 나의 푸른 발자국만 뜯어먹는다.

 

 


 

허순위 시인

1955년 경남 진주 출생. 부산대 지구과학과 수료. 대한신학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4년 <현대시학>에 '산백일홍'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1990년 무크지 <90년대 시>로 등단. 첫시집 <말라가는 희망> <포도인 아이> <소금집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