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순위 시인 / 달팽이 외 1편
허순위 시인 / 달팽이
상추 천 원어치에 딸려 온 달팽이 하루 종일 아이들의 유리병 주둥이를 돈다 둘러앉은 눈 여섯 개가 신기한 양 구경하는 유리시장 속 눅눅한 생명이다 사과 껍질도 찢어진 풀잎쪽도 없어 쉴 자리도 일자리도 없는 달팽이 유리 주둥이 그 빙판길을, 뼈없는 하류의 몸이 고난대로 제 몸을 만든다
허순위 시인 / 그 길은 푸른 발자국만 뜯어먹는다
외발로 멈추어 선 저녁 계단. 발바닥 밑으로 중력이 바뀌어간다. 집으로 가는 길이란 말 누군가 공중에 흩뿌려 놓은 포플러 잎사귀들같이 푸들거리는 슬픔과 불안의 공기를 뚫고 멀리 아득하다. 맡은 역의 대사는 아직 못 다 외웠지만, 기나긴 저녁을 두른 내 옷은 툭, 툭 끌러 터진다. 계단 밖의 남자가 운다 못을 박으며 계단 안의 여자가 운다 못을 뽑으며 노란 현기의 즙 발린 이마에 뜨는 햇살마다 조금씩 묻은 피를 훔치고 집으로 가는 길. 부글거리는 거품의 계단에 서서 시계 속에 나른하게 흐르는 어둠의 시침, 배반의 분침 그리고 상실의 초침… 낀 먼지 뽀얗게 떠들어대는 저녁이 긴 창의 집에 돌아가고 싶다. 조금 조금 조석으로 갈아쓰는 안경과 안경 사이 부푸는 시력의 차이만큼 사물의 가장자리 둥글게 휘어지는 안개의 매듭을 풀어 나아가자면 지키지 못한 내 생애의 약속들 계단마다 벽처럼 우뚝우뚝 치솟아 오르지만 집으로 가는 길 그 길은 나의 푸른 발자국만 뜯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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