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근 시인 / 사일구 유사(遺史) 외 1편
유병근 시인 / 사일구 유사(遺史)
도배를 핑계 대고 낡은 벽지를 뜯는다 흙벽과 함께 흙이 된 벽지는 따개칼로 천천히 긁어낸다 흙 묻은 칼날 끝에서 어디서 본듯한 갑골문자들이 부스럭 거린다 찢어진 갑골 문자를 맞추어 나가면 눈에 탄알이 박힌채 바닷물에 처박힌 주검이 떠오른다 주검을 밧줄로 끌어 올리듯 찢여진 갑골문자 부스러기를 더 가까이 눈에 대면 똥차 뒤 꽁무지에 덩치 커다란 동상이 질질 끌려 간다 어디서 만세 부르는 소리 귀청을 때린다 벽속에 갇혔다가 물꼬처럼 툭 터져 방안을 채우는 바다가 된다 사람들은 그것을 마산 바다라 한다 또 어누 누구는 부산 용두산 어디라 한다 벽지를 다시 헤쳐 보면 벌거숭이 된 흙벽 어느 틈서리엔 더 많은 갑골문자 부스러기들이 흙 뒤집어 쓴 채 꽁꽁 엉켜 있을 것 같다 먼 뒷날 누가 또 벽지를 뜯는 손에 미발굴의 출토품이 되어 한 줄기 카랑한 빛을 쏘겠다 지금은 아니고 먼 뒷날 나타나는 거룻배 되어 저승일을 덧없이 이승으로 실어 나를 것 같다
-유병근 시집 『사일구 유사』, 《시로》 에서
유병근 시인 / 필사본
깊은 밤 혼자 깨어 먹을 갑니다 먹물의 앙금 밑바닥에서 그대 물빛 건져 올립니다 몇 번이고 붓 가다듬으며 호롱불 심지 키웁니다 문 밖에서 서벅서벅 눈발이 흐득이고 눈발과 눈발 사이 젖어드는 눈발의 행간을 짚어 봅니다 그것은 쉽게 다가오듯 합니다 바람 속에 갇힌 저녁새 울음도 다가오듯 합니다 그러나 어제 읽은 그대 서책, 그 깊은 행간만 은 미처 다 짚을 수 없습니다 한 줄 쓰고 다시 먹을 갑니다 마음 갈앉히며 책갈피를 천천히 넘깁니다 책갈피 어디선가 그대 숨소리 눈발입니다 아득한 그대 눈빛 먹물에 잠깁니다 지난 가을 어느날의 산머루 같습니다 산머루는 어떻게 겨울을 나는지, 은은한 묵향으로 옮겨적는 그대 서책 가득 산머루 넋입니다 나도 덩달아 넋이 되어 언 손 녹이며, 그대 서책의 행간 속으로 잠겨듭니다
-시집 『금정산 』 한국문연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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