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홍윤숙 시인 / 가을 집 짓기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0. 26. 05:00

홍윤숙 시인 / 가을 집 짓기

 

 

돌아가야지

전나무 그늘이 한 겹씩 엷어지고

국화꽃 한두 송이 바람을 물들이면

흩어졌던 영혼의 양 떼 모아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서 한 생애 버려뒀던 빈집을 고쳐야지

수십 년 누적된 병인을 찾아

무너진 담을 쌓고 창을 바르고

상한 가지 다독여 등불 앞에 앉히면

만월처럼 따뜻한 밤이 오고

내 생애 망가진 부분들이 수묵으로 떠오른다

단비처럼 그 위에 내리는 쓸쓸한 평화

한때는 부서지는 열기로 날을 지새고

이제는 수리하는 노고로 밤을 밝히는

가을은 꿈도 없이 깊은 잠의

평안으로 온다

따뜻하게 손을 잡는 이별로 온다

 

 


 

 

홍윤숙 시인 / 날개를 위하여

 

 

한 생에 벌겋게

바가지로 쏟아 모은

진액의 땀방울들 그 아픈 궤적들을

나는 지금 폐수처럼 날마다

하수구로 흘려버리고 있다

이건 아니다 이래서는 안돼

조바심치는 내 안에서 또 하나의 내가

아니야 버려야 해

버리는 일이 네게 남은 유일한 숙제

얼마나 잘 버리느냐가

얼마나 잘 살았느냐의 답인 것을

버리지 못하여 노욕을 쌓고

버리지 못하여 노추를 부리는 미련은 싫다

버리고 버려서 깨끗이 비워 내야

비상의 날개를 달 수 있다

돌아가는 날 날개 없이 하늘을 날을 수는 없으니...

 

한 생애 지고 온 영욕의 땀

그 무거운 생의 항아리

이제 미련 없이 말끔히 비워내야 한다

비우는 일만이 네게 남은 일

천천히 소리 없이 흔적 없이...

 

-<그 소식> 홍윤숙 시인 시집

 

 


 

홍윤숙 시인(1925~2015)

1925년 황해도 연백 출생. 동덕여자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거쳐 서울대 교육학과에 입학. 6·25 동란으로 학교를 중퇴. 1947년 <문예신보>에 <가을> <신천지>에 <낙엽의 노래> <예술평론>에 <가마귀>를 발표하면서 등단. 195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원정(園丁)>이 당선.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 1975년에 제7회 한국시인협회상을, 1985년에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 1991년 예술원 회원으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