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권옥희 시인 / 숲의 낙인

파스칼바이런 2022. 10. 28. 05:00

권옥희 시인 / 숲의 낙인

 

 

바람을 지고 사는 오래된 숲은 늘 젖어있다

 

누구든 기대어 먹고살라고 문도 열어놓는다

 

두터운 각질 몇 겹으로 두른 나뭇등걸에 소복하게 붙어사는 초록이끼는 오래된 질문이다

 

나무가 겪었을 숱한 답변들이 푸르게 녹아있고

 

언제나 넉넉하고 조용했던 그늘의 순리를 바람은 따라가지 못 한다

 

당신이 머물다 간 자리도 내 안에서 그렇게 영역을 넓혀갔다

쓸모없이 뿌리째 뽑혀간 인연들

 

접촉할 수 없는 뿌리의 경계를 필두로 새로운 무늬가 생길 때 마다

당신도 햇살처럼 그리움의 낙인을 찍어주었다

 

숲을 나무가 껴안는 것일까, 나무를 황금 같은 날들이 껴안는 것일까

 

팔베개처럼 편안하게 이제 당신의 세월을 누이고 싶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6월호 발표​

 

 


 

권옥희 시인

경북 안동 임동에서 출생. 1992년 《시대문학》(현 문학시대)으로 등단. 시집으로 『마흔에 멎은 강』, 『그리움의 저 편에서』,『사랑은 찰나였다』와 공저 『별난 것에 대한 애착』, 『장미차를 생각함』 등 다수 있음. 2004년 강서문학 본상 수상. 2017년 강서문학 대상 수상. 2021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디딤돌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인협회, 문학의 집서울 회원. 강서문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