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원 시인 / 거절의 사전 외 1편
이여원 시인 / 거절의 사전
거절의 사전에는 꼬리말이 붙어있다 붉은 무안함이 색인으로 표시되어 있는 지점, 위로는 등을 두드리고 상한 마음은 발등을 내려다본다 누구든 이 거절의 사전 한권쯤은 갖고 있다 개정판이든 오래전 것이든 구차한 생활 목록에 꽂혀 있다
거절의 사전은 무거운 낱장으로 엮어져 있고 자음과 모음이 맞지 않아 더듬거리는 문장이다
혓바닥은 가볍게, 가지런히 풀어놓은 불혹의 거짓말 완곡한 요구와 정중한 거절의 확률은 대부분 한 페이지에 같이 수록되어 있다 때론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경우도 있고 이미 몇 군데 빌려준 예도 있어 단일문장으로 이렇듯 많은 갈래의 의미를 지닌 해설도 드물 것이다 서글펐던 거절과 서글펐던 부탁이 한 입에 있고 건조한 음성으로 처음 발음해보는 단어를 입에서 끄집어내야 할 때가 내게도 있다 우리의 혓바닥 밑에는 절판되지 않는 수천 권의 사전들이 있다
ㅡ시집 『빨강』 2019. 현대시
이여원 시인 / 엄마네 꽃집
부업의 가게에는 벨벳의 시간이 있다 부친의 계약은 늘 바깥의 일이었고 엄마네 꽃들이 우리 집에서 회복기를 거치는 동안 쌍가락지의 짤랑거리던 원이 내 손가락에서 헐렁하게 빛났다
멋쟁이 꽃들이 화분에 담겨 배달되었다 창피한 교복의 시간, 단정한 창피함
짜증나는 꽃의 꽃말들을 애써 찾았다 엄마의 플로리스트 자격증 안엔 분갈이의 향이 짙었다 근방에 없던 직업이라는 것 넓은 터를 유산으로 받는 슬픔
처음 보는 꽃들, 처음 보는 향기들이 집을 옮길 때마다 지루하게 따라다녔다
예쁜 엄마의 시절만 찾아다녔고 낯선 꽃말이 생리를 물어다 주었다 사루비아 꽃의 단내가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꽃은 엄마네 꽃집에서 가장이었다
길게 웃자란 가지 꺾어 사방수반四方水盤에 일주지 삼아 놓고 표정 없는 꽃숭어리들을 소개시킨다 엄마네 꽃집에선 계절이 없어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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