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유안진 시인 / 시(詩)가 나에게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1. 4. 05:00

유안진 시인 / 시(詩)가 나에게

 

 

아직도 모르겠어?

한번 발들이면 절대로 못 빠져나오는

사이비종교가 ‘나’라는 것을

<ㄴ>받침 하나가 모자라서

<말씀>이신 신(神)이 못되는 어눌한 말인 걸

쓸수록 배고파지는 끝없는 허기

쓰고 보면 제정신 아닌 남루뿐인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소설가 화가 음악가… 와는 달라서

만 번을 고쳐죽어도 일가는 못되느니

시 쓰며 인간이나 되라고 <시인(詩人)> 아닌가

꿈 깨게, 문여기인(文如其人) 잊지 말고.

 

-시집 『터무니』, 서정시학, 2021년

 

 


 

 

유안진 시인 / 지란지교를 꿈꾸며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

 

비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 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며,

천 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 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시집, 『지란지교를 꿈꾸며, , 서정시학, 2011.

 

 


 

유안진(柳岸津) 시인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사대 및 동 대학원에서 교육심리학 전공.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19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1970년 시집 『달하』 『물로 바람으로』 『월령가 쑥대머리』 『봄비 한 주머니』 등 10여 권의 시집과 시선집을 출간, 수필집 『우리를 영원케 하는 것은』 『축복을 웃도는 것』 등과 장편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 『땡삐』 등의 작품이 있음. 국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월탄문학상 등을 수상. 서울대 아동학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