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선 시인 / 사랑이 샌다 외 3편
김효선 시인 / 사랑이 샌다
헐거운 어둠 속에서 나를 조여주던 나사가 더 이상 조여지지 않는다 흐르는, 흘러가는, 수도꼭지에서 흐느끼는, 흐느적거리는, 물이 똑똑 떨어진다 어둠 속에서 금속성 소음이 걸어나온다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물방울들에겐 그림자가 없다 나사를 다시 제 살 속으로 조여보는 어둠 속, 길게 늘어진 내 손끝에서 똑똑 물이 떨어진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흐르는, 흘러가는 수도꼭지를 잠그지 못한다 흐느끼는, 너를
2004년 계간《리토피아》신인상 당선시
김효선 시인 / 기분이라는 무릉*
언제부턴가 잊힌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수에 들어 길을 잃어야 갈 수 있는 곳 그곳엔 호수를 들여다보며 미래를 보는 사람들이 아직 오지 않는 꽃밭을 살고 있다고 했다 듣고 나면 멀미로 가득한 생이 펼쳐진다고도 했다
구름이 발바닥으로 가득 차 올해 농사는 풍작이다 메주가 걸린 처마 아래 벽에서 가는 금들을 훔쳐다 입는다 풍경은 기분에 따라 꺼내어 보는 주머니 같았다
진눈깨비의 발목이 지워지는 꿈 인연, 거울 저쪽의 연인 눈을 뜬 채 실잠을 자면서도 귀가를 서두르지 않는다
전생이 미래로 이어진다는 깨알 같은 믿음이 복사꽃 지기를 기다려 푸른 엉덩이를 내민다고 해도
우리는 모두 잊힌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땐 내가 아니기를
*무릉: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마을.
계간 『다층』 2021년 겨울호 발표
김효선 시인 / 베르쿠치*
눈을 가리면 사막은 영원히 따라오는 유목의 덧신
왕이 시인을 도둑으로 몰았을 때 너는 눈을 감았고 나 또한 입을 닫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아무리 보여주려 해도 귀를 내밀지 않았다 시각과 미각이 사라지면서 촉각을 얻었다 눈앞에 머무는 공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놓지 않았다
소녀의 이름은 얀 그녀는 쥐가 우글거리는 집에 살지만 쥐를 잡아 오라고 시키지는 않는다 시시한 부랑자나 쫓을 내가 아니니까 그녀는 그을음이 벗겨지지 않는 까만 손으로 염소 젖을 짠다 야크는 너무 늙어서 젖이 나오지 않는다 얀은 플로 베지테리언** 우유에 구운 빵을 찍어 먹는다 식사가 끝나면 사막으로 나가 붉은 여우를 살핀다 눈을 감고 사막의 공기를 혀로 핥는다 기린은 코를 킁킁거리며 마른 풀을 되새김한다 사막은 어떻게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사냥할까 발톱은 초승달 무늬가 새겨진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쥔다 죽고 싶어 설산에 올랐다 살고 싶어 죽을 힘을 다해 내려왔다는 눈빛 태양을 뜨겁게 달군다 붉은 여우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내 어깨에 닿는다 금세 밀려오는 모래폭풍 근성이 본능으로 자리 잡는 순간 사막은 유순한 짐승처럼 혀를 내어준다 영원히 내 뒤를 따를 근친이라는 감옥
아무리 저항해도 사막은 발톱을 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족쇄 뱉어도 뱉어도 입에서 모래가 자꾸 만들어지는
시인은 왕을 버렸다 얀은 머리에 양말을 뒤집어쓴다
*독수리 사냥꾼 **플로 베지테리언: 우유 등의 유제품과 동물의 알, 생선, 어패류와 닭고기 등은 먹는 단계의 베지테리언을 뜻한다.
계간 『시마』 2022년 봄호 발표
김효선 시인 / 시든 옐로
여자는 침대 모서리 근처에 앉아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카나리 옐로 빛으로.
여름과 가을 사이 쇠를 먹고 자라는 풀이 있다. 풀을 먹고 크는 쇠가 있는 것처럼. 창문은 날마다 그런 기분을 주워 먹으며 몸을 불린다. 한 번씩 굉음을 지르는 트럭 소리에 체하기도 하면서. 시트는 축축하고 비누 냄새에 뒤섞여 소란한 내일이 얼비치기도 한다.
태양은 자신이 새긴 핏줄이 뻗어가는 힘으로 타오른다. 어디든 스며들어 자신을 숭배하도록 목을 조인다. 기꺼이 맹신의 피가 흐르도록. 촘촘한 성격은 어떤 눈빛으로도 걸러지지 않아 저녁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풀이 쇠처럼 빛을 낸다.
한해살이는 키를 키우는 목적이 전부다. 녹슨 못과 나사들이 풀 아래 아무렇게 버려져 있다. 쇠를 먹는 사람은 아직 살아있다. 쇠가 풀처럼 자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만. 풀의 꼭대기엔 오직 하나의 쓸모가 잠들어 있다. 곧 허공을 쓰러뜨리기 위한,
여자는 걸터앉은 자세의 몸을 응시한다. 옐로는 점점 마호가니빛을 띤다. 침대 시트에 새겨넣은 주름은,
이제 우는 것도 짖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어진 영혼이다.
계간 『사이편』 2021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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