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언 시인 / 가능한 사치와 불가능한 꿈 외 1편
김도언 시인 / 가능한 사치와 불가능한 꿈
따뜻하지만 가볍지 않고, 건전하지만 예리하고, 깊으면서도 겸손하고, 적당한 침묵과 자랑하지 않을 만큼의 학식을 가진, 그러나 어둠 속에 오래 숨을 줄도 알고, 넉넉한 소유를 민망해할 줄도 아는, 떼 지어 시끄럽게 다니지 않고, 상처와 궁핍을 전시하지도 않는, 그런 드문 사람들과 숲속의 풀밭 위에서 드럼통에 불을 피워놓고 둘러 앉아, 아주 천천히 독한 술을 마시면서, 지나온 생애와, 다가올 미래의 불안과, 불안 속에 섞인 희망과, 나눌 만한 근심과, 은밀히 예측되는 소멸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 그들은 각자 헤어져서는 차갑고 맑은 글을 쓸 것이다. 모인 자리에 늦게 오는 자는 맑은 술이 든 유리병을 들고 오면 좋겠다. 음악도 있으면 좋겠지. 그리고, 그 이외에는 모든 정물, 정물의 운명처럼 움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 이야기는, 가족을 추억하는 것도, 실책에 대한 반성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희망도 아니었으면 좋겠다. 예컨대 '베니스 행 티켓을 끊고 싶어 그 사람은 장관직 에서 물러나야 해' 같은 말을 하는 자는 불속에 던져질 것이다. 단지 정신의 욕망만을 말하는 것이다. 헤어져서 쓰는 글처럼 차가운 욕망을 둘러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격하지 않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창백한 얼음처럼 날카로운 욕망들이 얼마나 고요하게 말하여질 수 있는가를 넉넉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바흐나 슈만의 음악을 들으며, 아니면 아일랜드 같은 슬픈 나라의 민요를 들으며 향기로운 술을 마시고 모든 이슈와 루머를 차단하는 것이다. 마그리프 뒤라스처럼 늙어도 추하지 않을, 그를 아름답게 만드는 젊은 애인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설레게 하는, 설레는 사람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꿈꾸는 불가능이다. 불가능을 꿈꾸는 것은 가장 가능한 정신의 사치라는 걸 안다.
김도언 시인 / 아버지는 과학선생님이었다
아버지는 과학선생님이었다 아버지는 한번도 축구선수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사막의 여행자도 아니었고 아버지는 불을 끄는 소방수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조금도 가수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파리하고 소극적인 과학선생님이었다 아버지는 겨울의 나비처럼, 혹은 동굴 속의 붕어처럼 좀처럼 관찰되지 않는 과학선생님이었다 해부되지도 않고 보고되지도 않는, 이상한 과학선생님이었다 아버지는 우주비행사가 아니고, 만두와 김밥을 파는 평화분식 사장님도 아니고 심지어 군인도 아니었고 나에게 아무런 기쁨이나 슬픔도 주지 않는 과학선생님이었다 그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아무에게도 기쁨도 주지 않고 슬픔 또한 주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낯선 과학이다 아버지는 택시드라이버도 아니었고 아버지는 어부도 아니었으며 아버지는 가장 비과학적인 과학선생님이었다 내가 아는 한 그는 자신의 교실에서 희망, 사랑, 비극, 농담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 점에서 그는 가장 과학적인 과학선생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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