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소 시인 / 폭염 외 1편
유지소 시인 / 폭염
초록색은 초록색으로 지워야 들키지 않는다 한 개의 떡갈잎을 지우기 위해 두 개의 떡갈잎을 그린다 두 개의 떡 갈잎을 지우기 위해 네 개의 떡갈잎을 그려야 하듯이
떡갈잎의 생명은 톱니바퀴에 있다 톱니바퀴는 너를 자전거에 태우고 떡갈나무 숲으로 데려오는 역할을 한다
너의 입술과 내 입술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때 떡갈나무 숲에서는 총알이 퓡― 퓡― 퓡― 날아다니고 우리가 없는 어떤 나라에서는 진짜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재촉하지 말자 아무것도 불타는 대지를 깊은 한숨처럼 느리게 느리게 걸어가는 얼굴일지라도 심장은 아무리 빨리 뛰어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한 다 악몽처럼 너는 나의 심장에서 뛰고 있다
한 개의 너를 지우기 위해 두 개의 너를 그린다 두 개의 너를 지우기 위해 네 개의 너를 그려야 하듯이
초록색은 바닷물이 다 마를 때까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조금 있으면 곧 휴가가 시작되고 아무도 없는 등대까지 우르르 몰려갔다가 우르르 돌아 오는 밀물처럼 나도 그렇다! 나도 그렇다!는 속삭임이 우리 사이에 흘러넘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미칠 듯이 한 사람만 생각하면 모두 그렇다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유지소 시인 / 드디어 아무것도 아닌 사람
0시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너는 사람도 아니야! 할 때의 그 사람도 아니었다 빠앙! 빵! 경적을 울리면서 달렸다 기분이 더러워진 당신이 허겁지겁 쫓아와서 이봐요, 빵집 아저씨! 내게 소리를 꽥 지른다면 나는 그 빵집 아저씨도 아니었다
내가, 웃고 있었다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처럼 내가, 폭발하려 하고 있었다 내가 없고 나 혼자서 환했다 지금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늘은 지났고 내일은 멀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아무도 묻지 않은 채 조용히 인생이 끝날 수도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당신 열쇠는 당신에게 주었고 내 열쇠는 내 주머니에 있다 나와 상관없이 강물은 흐르고 신호등은 바뀌고 별은 빛나고 들개는 죽었다 당연하고 당연하고 당연했다
나는 달리고 있었다
터널이 나타났다 라이트를 켭시다 지금부터 당신은 터널을 통과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불빛이라면, 나는 이미 두 개의 불빛, 불빛을 켜고 달리고 있었다 내 불빛은 충분히 밝고 빠르고 넘친다
절 한 채가 나타났다 촛불을 켜세요 지금부터 당신은 무릎을 꿇고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될 것이오
미안하다, 나에겐 빌어야 할 소원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이 순간 당신 이모가 될 수도 있지만
이 순간 당신이 손을 번쩍 들고 이모, 여기 소주 두 병 요! 나를 부른다면 당신은 운명적으로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유령이 될 것이다
0시의 도로는 리본에 묶여 있다 어떤 리본은 길고 노랗고 어떤 리본은 짧고 하얗다 도로는 내게 배달된 소포 같다 나는 리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리본의 끝은 어디에 있을까 리본의 매듭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한 개의 빗방울이 떨어지고 조금 이따가 몇 개의 빗방울이 더 떨어졌다 이 길 위에서 내가 아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해도 길은 여전히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똑 똑 똑. 기지개를 켜시겠습니까? 그럼 당신은 천년 동안의 무덤에서 깨어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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