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진성 시인 / 익명에서, 익명에게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1. 14. 05:00

박진성 시인 / 익명에서, 익명에게

 

 

왜 여기 있니 얼마나 찾았는데

네 목소리만 들리더구나

내 귀로 분명 들었는데

너는 그냥 종이들이구나

숨은 것과 없는 것을 골몰하다가

나는 어느 밤이 되었는데

너는 그걸 과일이라 부르는구나

오래전에 나는 죽었는데

너는 손목을 잡고 싶다는구나

네가 흘리고 간 그림자는 성대만 가졌구나

나는 기차가 되었는데 너는 그걸

아르헨티나라고 말하는구나

좁은 방에서 비명을 지르는데

너는 오빠가 드디어 나타났다고 웃는구나

팔레스타인 여자를 언니로 바꾸는 기술을

네게서 배운다

우리는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푸른 공기였지만

아파트 복도의 새벽 두시였지만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안 보이는 폭력들에 대해서

더 안보이는 죽음들에 대해서

말해야만 했지

 

선언문이 되는 순간 목소리를 잃을까봐

너는 두려워했다 사랑하는 방식은 도시의 숲에서 배울 것,

아니다 사랑은 배우는 게 아니다

나무의 목소리를 나무에게 돌려주는 게 사랑이라고

너는 말했지

 

그렇다면 나는 내 귀를 걸어둘게

바람에 빵집에 거대한 크레인의 공중에

그리고 네가 쓰지 못한 문장들에

떠도는 귀들을 걸어둘게

목소리의 주인은,

움직임이라고 해둘게

 

 


 

 

박진성 시인 / 나비

 

 

너 있던 곳에서

나 있는 곳으로

 

나비가 한 마리 날아왔다

 

온 세계가 옮겨왔다

 

-박진성, 「하와와, 너에게 꽃을 주려고」,

 

 


 

박진성 시인

1978년 충남 연기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 졸업. 2001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목숨』(천년의 시작, 2005)과 『아라리』(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식물의 밤』과 산문집 『청춘착란』이 있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2004년, 2007년, 2012년).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