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고미경 시인 / 섣달외 3편

파스칼바이런 2022. 11. 16. 05:00

고미경 시인 / 섣달

 

 

밀쳐두었던 바느질감을 잡듯

지나간 날들을 무릎에 올려놓는 밤이다

 

기억을 불러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왕겨를 덮고 한겨울을 건너가는

푸른 마늘촉 같은 슬픔을

살며시 헤집어 보는 일

 

한때는 불구슬을 삼킨 것처럼

어쩌지 못하던

오매불망寤寐不忘이란 말은

이제, 내게서 잊힌 얼굴이지만

 

어린 새의 울음처럼

애잔하게 작별인사를 건넸던 목소리들이

아주 먼 곳으로부터 와서는

천장에서 떨어지는데

 

어떤 구음口吟들은

마음에 비스듬히 기대고

스며들고 얼룩으로 번진다

 

나는 오랫동안 간직할 게 많아서

무리를 짓지도 않고

무리에 끼지도 않고

나를 들여다본다

 

 


 

 

고미경 시인 / 하나의 이야기는 수많은 이본이 되고

 

 

 내 친구는 담배를 끊듯이 나를 끊어버렸죠

 

 세탁소와 편의점 사이 점점 뾰족해지는 겨울 속 맨발의 여자가 위태롭다 저만치 약국 앞을 서성이던 바람이 체위를 바꾸고 그렁그렁한 아침이 막, 돌아 나온다

 

 '혹시나’는 참 눈치 없는 말이에요

 

 여자의 왼쪽가슴에서 오른쪽가슴으로 버스가 지나가면서 보풀이 일어난 낡은 고요 몇 장 탈탙탈 털어내 버리고

 

 '만약 만약’은 살얼음처럼 깨지기 쉬운 말이에요

 

 꼬불꼬불 구깃구깃해진 과거는 펼 수 없고 잠에 빠진 가로등은 눈깔사탕만큼씩 꿈의 구전본口傳本을 만든다

 

 '그래도’는 두 손으로 얼굴을 푹 감싼 말이에요

 

 여자가 문구점을 건너 카페 셀렉토 쪽으로 기울어질 때 물고기 비늘 같은 말줄임표들이 여자의 머리카락에 달라붙고

 

  ……이제 막 도착한 눈송이들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가 사랑한 산베니토는 아직 그 여름에 있겠죠

 

 


 

 

고미경 시인 / 여수

 

 

당신은 여수에 가자고 했습니다

 

동백이 기다린다고

 

나는 가지 않았습니다

 

혼자 피었다가

 

혼자 지도록

 

모르는 척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피어나

 

속수무책으로

 

꽃은 저물고

 

다시 봄날

 

새는 아무것도 모르고 울지만

 

당신이 여수라서

 

동백이라서

 

나는 꽃멀미가 멎질 않습니다

 

 


 

 

고미경 시인 / 늦시월

 

 

숲은 자꾸만 헐거워져

 

새들의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발효된 시간의 이파리들은

 

내 마음의 골방에서 밀주냄새를 풍기고

 

가끔씩 마른 기침소리가 들린다

 

사소한 것들의 결이 만져지는 한 잎의 시간에

 

나는 겨우겨우 당도했다

 

촛불을 켠 잎들의 기척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니

 

팽팽히 당겨진 쪽빛 허공을 찢으며

 

샤먼이 된 새들이 영혼의 길을 내고 있다

 

한 잎의 꿈으로 밟고 가라고

 

온몸으로 소지를 올리는 단풍나무

 

필생의 꿈으로 타오른다

 

 


 

고미경 시인

1964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인질』(문학의전당, 2008)과 『칸트의 우산』(현대시학, 2015), 『그 여름의 서쪽 해변』(현대시학, 2022)이 있음. 현재〈시비〉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