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기인 시인 / 몸살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1. 15. 05:00

이기인 시인 / 몸살

 

 

늦봄과 초여름 사이 찾아온 감기가 좀 나아 질 무렵

하루 세 번 챙겨먹은 약봉지가 식탁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부스럭부스럭 찾아오신 어머니가 감기를 가지고서

고구마 줄기처럼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감기가 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서 소나기가 좀 억세게 오는 것 같다

윗목에 앉아 억세게 비를 맞고 계신 큰 잎사귀의 몸살을 본다

 

-시집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창비)中

 

 


 

 

이기인 시인 / 시인에게 온 편지

 

 

청송교도소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밥풀냄새가 난다 그쪽도 내 독자다

지금은 봄이군요 그리고 아무 말이 없다

새순이 돋아서 좋다 꽃이 피어서 좋다

그쪽도 어쩌다 내 쪽으로

가지를 뻗어서 좋다

검열한 편지지 속에서

삐뚤삐뚤 피어난 꽃

볼펜 한자루에서 피어났다

오늘은 저녁 쌀 씻다 한줌 쌀을 더 씻다

 

 


 

이기인 시인

1967년 인천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성균관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방직공장의 소녀들>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창작과비평사, 2005)과 『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창비, 2010), 『혼자인 걸 못 견디죠』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