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전건호 시인 / 비등점 위의 사랑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1. 23. 05:00

전건호 시인 / 비등점 위의 사랑

 

 

휘발성 안개 자욱한 밤

불티처럼 어둠의 한복판을 질주하던 나는 이 별의

시한폭탄

 

담벼락에 그려진 낙서들이

수동형에서 능동형이 되도록

나를 버린 접속사들을 달래며 집착했다

 

나는 무중력의 궤도를 떠도는 떠돌이별

 

글자들이 지시하는 대로 행진을 하고

운명을 조망해주는 별빛을 따라 떠돌았으나

돌아보면 또 그 집 앞이었다

 

거미줄 같은 길들이 나를 가둘수록

휘발성 어둠 가득 찬 마음은

아직까지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남긴

글자들에 조종되고 사육되었다

 

유일한 좌표란 어둠 속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

 

자정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석유처럼 흥건한 어둠에 몸을 맡기다보면

그를 향해 흐르던 강물이

바람과 시간의 경계에서 하얗게 멀어져 갔다

 

내가 쓰다 버린 백만 개의 파지들이

구원의 나룻배처럼 흘러올 거 같았다

 

 


 

 

전건호 시인 / 피타고라스의 추억

 

 

풀리지 않는 방정식은 관계 속 절벽이 되었다

 

너를 단념하고 돌아선 갈림길

 

그리움을 접어야 했던 순간을

실선으로 이으니

도형 속 갇혀 있는 빛과 어둠이 몸을 포갠다

 

침묵의 꼭지점에 저녁별이 뜬다

1분만 더 기다렸더라면

조금만 더 쳐다보았더라면

한번만 더 고백했더라면

역삼각형은 정삼각형이 되었을까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의 바다

비는 내리고 결빙된 빗방울은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으로 물길을 낸다

 

일 인치만 더 팠더라면

옆으로 살짝만 비켜졌더라면

조금만 목소리 낮추었더라면

가시 끝 오월의 장미는 피었을까

 

손 한 번 더 내밀었어도

당신과 나 사이를 막아서던

파도의 꼭지점에 저녁별이 떴을까

 

- 시집 《꽃점을 치다》 2021. 도훈출판사 -

 

 


 

전건호 시인

1961년 충북 영동에서 출생. (전병하). 한남대 행정학과를 졸업. 2006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 시집 <꽃점을 치다> <변압기> <슬픈묘지>를 발표. 현재 『시와 정신』 운영위원장. 천태산 문학상, 제9회 한남문인상 젊은작가상 수상. (사)숲힐링문화협회 대표. (사) 문화예술진흥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