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선호 시인 / 바람을 낳는 철새들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1. 27. 05:00

정선호 시인 / 바람을 낳는 철새들

 

 

늦가을 독도법에 익숙한 철새들이

시베리아 찬 바람을 안고

소속부대로 복귀하듯 저수지로 왔다

 

철새들이 제 깃털로 바람개비를 만들어

저수지 방죽에 걸어놓았다

바람개비들은 철새가 안고 온 찬 바람과

남녘에서 불어 온 바람에 거세게 돌았다

 

바람개비들은 돌아 전기를 만들어 나무에 보내

철새들이 날아다니는 길을 환히 밝혔다

전깃불은 마을도 환하게 비춰 불빛에

죽은 영혼들이 깨어났다

 

영혼들은 활과 창을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저수지에 갔고 아침이 오면

바람개비 속으로 들어가

지도를 따라 저승으로 되돌아갔다

 

철새는 바람을 끊임없이 만들어

사람들에게도 풍요로운 힘을 전했다.

 

-시집 『바람을 낳는 철새들』에서

 

 


 

 

정선호 시인 / 야자나무라는 짐승

 

 

그날은 해변에서 야자나무를 마주했다

몸뚱이는 바람에 닳고 닳아 밋밋하고

겨우 머리끝에 줄기를 만들고 열매를 맺어

바다라는 우리에서 울며 육질을 키웠다

그 가히 없는 울음들이 열매 안에 고였다

 

야자나무를 닮아 거친 피부의 적도 사람들은

밋밋한 야자나무의 몸뚱이를 타고 올라가

뚝, 열매를 따 야자나무로 엮은 집으로 갔다

붉은 사랑의 흔적을 찾아 음식을 만들고

해와 달의 슬픔과 바람의 흔적을 마졌다

 

야자나무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전봇대처럼

다시 연인과 살을 비비며 해변을 걸었다

연인은 야자나무 밑에서 사랑을 나누었고

야자열매 같은 아이를 낳아 길렀다

아이들도 열매를 먹고 마시며 자랐다

 

그날 할 일 없이 해변을 걷던 내 몸도

수없이 파도에 부딪혀 팔과 다리를 잃고

정수리에야 꽃 피고 열매 맺음에 서러워서

수만 번 서러워서 울고울어

그 눈물 열매 안에 넣어 삭이고 삭였다.

 

야자나무는 파도와 바람이 빚은 짐승이다

 

 


 

정선호 시인

1968년 충남 서천 출생. 금오공과대학교 생산기계공학과와 창원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2001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으로 『내 몸속의 지구』 『세온도를 그리다』 『번함공원에서 점을 보다』가 있다. 필리핀 파견근무로 필리핀 수빅(수도 마닐라 주위)에 거주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