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남 시인 / 포자의 시간 외 1편
홍성남 시인 / 포자의 시간
밤을 건너기 위해 이야기는 매일 죽는다
처음 이야기는 한시적이어서 옆구리가 닳아버린 단편은 손금 속으로 흘려보낸다 어둠 속에서도 길어지는 그림자는 서로를 속이는 즐거움 사이는 그렇게 태어난다
어떤 이야기는 푸른곰팡이가 되어 번진다 알지 못하는 포자는 슬픔도 없이 가식도 없이 보이지 않는 줄거리로 숨는다 내일은 내일의 이야기만 있을 뿐
어제 한 인사 오늘은 그만하자
어둠 속에서 더 검게 젖어 있는 것은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밤의 가장자리에 도착해 보면 죽은 채 오래 살아있는 어느 몽상가의 저녁이 있다
우리는 서로의 이유가 있다는 말을 믿기로 한다 깨진 유리 조각으로 혈서를 쓰는 줄도 모르고 버려진 너의 표정 같아서
창문 너머에서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미래에 대해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자꾸 떠돈다 처음 들어보는 이국의 말들이 지나가고 입을 벌리면 해독되지 않는 새들이 한꺼번에 입속에서 날아 오른다는 그런 이야기 내가 없이 천국이 시작되는 그런 이야기 모든 슬픈 이야기는 나의 손금에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거라고
* 페르난두 페소아 시집 제목 중에서
계간『시와 산문』 2022년 여름호 발표
홍성남 시인 / 사과의 자리
누구도 사랑한 적 없다는 듯 사과가 떨어진다 결말에 기대지 않겠다는 결심처럼 어디인지 묻지 않고 봉분처럼 멈추어 있다
사과나무들이 차례차례 뒤돌아 가고 있었다
그런 풍경은 좀 이상했다
어제처럼 오늘도 해가 뜨고 바람이 분다
그런 것이 자리라면
먼 곳을 보려고 나는 잔뜩 웅크린다
다시 일어서도 같은 곳을 볼 수는 없을 거야 사과는 움직이지 않고 사과를 밀어낸다 그런 안간힘으로 어디선가 기차는 떠나갈 것이다
떠나는 것과 떠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사과는 무심한 얼굴이다
그런 얼굴을 뭐라고 불러야하나 해마다 사과가 열릴 것이고 사과는 또 떨어질 것이고
떨어진 자리와 떠나온 자리 사이에서 나는 오랫동안 사과꽃을 피우겠지 사과꽃들 분분 날리겠지 그런 가벼움이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떨어진 사과를 오래 바라볼 수 있겠지
계간 『문예바다』 2021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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