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경훈 시인 / 시 놉시스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2. 12. 7. 05:00

정경훈 시인 / 시 놉시스

 

 

유월의 h는 유월에 있었고

토마토치아바타에 바질크림치즈를 발라 먹었죠

하지만 사람들은 사소한 찰나를 기억하지 못하죠

이런 이유로 사람을 싫어하게 된다면

 

말해야죠, h는 유월이었습니다

그곳의 모든 것이 유월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말했죠, 눈 밝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기를요

옷깃이 스치면 인연이 된다고 했죠

말해야죠, 서로의 옷깃을 저항했었는지에 대해

그럼요 h, 눈이 부실 때가 됐죠

 

낮이 길어지고 제철 과일이 떠오른다는 건

긴 밤과 꿈의 편력이 연필처럼 짧아진다는 거죠

 

하지夏至에는

한 남자가 한 여자 품에 안겨 울었죠

한 테이크가 러닝타임이 되어버린 듯이

귓등에 연필을 꽂은 사람처럼

시나리오가 번뜩였죠

 

바다 같은 사람은 못돼도 호수 같은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갈게 너의 쪽방으로, 너의 골방으로, 아니야? 너는 상냥해 나도 상냥할 거고, 나 너를 상냥해 아니, 사랑해, 너도 나를…… 상냥해? 유치하다고? 빌어먹을 유행가냐고? 뭔지 모르겠어? 아니야, 아니야, 내가 뭔 말을 하겠니, 언어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미안해, 갈게, 갈게, 언제든 불러줘, 가는 길에도 멈출게

 

하지에는

말이 많고 외투는 장롱에 있고 대사는 남루해지죠

시 나리오가 제격이죠

유월에는 영화가 제철이고

우리는 내년에도 유월이겠지만

사람들은 작년부터 쿨해졌고

기억 따윈 시 한 편의 페이지처럼 구겨 버렸죠

빵 부스러기를 털며 읊조렸죠

눈 밝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기를요

 

너는 눈을 뜨고 나를 보듯

시 나리오를 읽으며

한 사람은 가야 할 텐데, 말했죠

유월에는 걱정이 많고

한 사람은 가는 길에도 멈출 것인데

h는 냉소적이죠 말보다는……

 

너를 되짚어보며 관람을 했죠

눈동자가 참 밝았죠

밤과 꿈이 짧아지는 찰나에서

오늘이 하지래, 사람들은 자꾸 재채기만 한다

너의 오래 뜬 햇살에 구름 대신 대사를 띄우며

하루 끝을 저항했죠

 

하지에는 그래야만 했죠

유월에도 그래야만 했고

토마토치아바타와 바질크림치즈처럼

궁합이 좋은, 사소한 상냥함이 필요했던 거죠

h와 h는요

 

 


 

 

정경훈 시인 / 아디오 도시

 

 

빨간 세계를 움켜쥔다

스트로베리문

 

우리는 그달

잘 익은 딸기를 가리키며

배가 고픈 나머지 형제의 손가락을 잡았다

먹는 이야기와 먹히는 이야기

인력과 척력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지

러브에 대한 진실을 꿰뚫으며

보름달을 따듯 진심을 해체했지

의좋은 토끼 간을 해부하듯

목이 베인 인디언을 방관하듯이

 

세계의 모든 힘이 벗겨지기를

달을 스무디처럼 갈고 싶었다

 

메밀전병과 메밀전 그리고 막걸리

이 거리는 전통음식이 어울리고

서촌 처마에서 전력 질주 중인 붉은 달을 바라보며

 

언어가 꽂히는 속도가 빠르면 더럽다고 할 테야

비밀이지만 우리는 비수처럼 연약하고

사랑하지 못할 순간은 너무 많고

돌아가는 길은 너덜너덜

빈곤한 주머니 신세지만

택시를 욱여 타면 창문을 손처럼 활짝 열고

검게 그을린 거미줄을 던진다

 

보호막을 치는 거니?

죽은 척을 하는 거야

현실을 직시한 거니?

자신을 사랑하기 위함일 거야

박애주의자니?

 

거미는 웅크리고 웅크리다

가슴에 박힌 점이 되고

너의 가슴을 들여다보는 일이

처음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스트로베리문이 안녕히 가지 않게

힘껏 깨물었다

 

 


 

 

정경훈 시인 / 영원히 백스테이지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해

은밀한 정적 황홀한 풍경 잔혹한 놀이 섬뜩한 미장센을

 

 망치와 타카 총을 든다 시공간을 설치할 계획이다 구현에 대한 의심이 길어질수록 공사장의 아침은 만유를 철거할 것이고 이내 우리는 환각 속에 갇힐 것이다 약발이 떨어지면 닫힌 결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고 삽입곡은 아주 고독히, 마음보다 딱딱하게 흐를 것이다 꿈일 수도 있겠다 섬망일 수도 있다 우린 그저 영화 속에 있고 프레임을 가득히 채울 뿐이니

 

카르마, 카르마라 부르자

사람이란 태곳적부터 배우였던 거야

 

그럼 셸리, 너는 굳은살을 만드는 거야 내가 너를 만지면 너도 따라 나를 만져줘 이 장면이 넘어가지 않게 할리우드도 따라오지 못할 시퀀스로, 그러니 정해진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마 끝없이 악기를 연주해 줘 나는 멜랑꼴리에 대해 할 말이 많고 셸리, 너는 오늘이 지나도 내 옆에서

 

은밀한 정적 황홀한 풍경 잔혹한 놀이

저 너머에서는 왜들 그리 소란일까

 

모두 고요히, 잔만 부딪히자 왜 그토록 깨져야 했는지 궁금치 말자 우린 너무나도 많은 유리 파편이니까 셸리, 나는 스푸만테에 취하기도 해 타격감 있는 공격에 혀가 도취되기보단 몽글몽글하게 어질러지는 거지 물음표 살인마는 대본에 없어, 궁금치 말자 우리가 왜 깨져야 했고 밟혀야 했는지, 이유조차 모를 테니까

 

스피크이지는 이렇게 시작되고

미러볼은 없는 거야 대신 망각의 별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

셸리, 우리의 카르마는 영원해

 

이곳에는 단시를 길들이는 관습이 있다 나는 악역을 자처한다 하나 있던 캐릭터는 순식간에 죽고, 또 다른 나는 숫자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습관은 애드리브처럼 꿈틀거리고, 스크린이 더럽다는 컴플레인에 내 손은 얹을 곳을 잃는다 마지막 자유를 뺏기자 손가락은 꺾여야 했고 너는 내게 왜 만졌는지에 대해 묻지 마라, 너의 물음은 무음처럼 고요히

 

더럽기만 한 영화는 시간을 죽이고

우리는 금지된 집합을 어기며 놀이를 하곤 했다

스피크이지를 시작하면 서로의 얼굴을 훔치고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해, 수군대지만

저 너머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정경훈 시인 / 6호선 이태원

 

 

1

 

너와 나의 성은 전염이다

점철을 가득 실은 원자폭탄이 서울 중심부로 떨어진다는 소문

우리는 그저 전염성이니 죄다 버리고 떠나야 한다

 

가장 위험한 여름입니다 여름은 박하사탕입니다 박하사탕은 “사랑해”와 같은 냄새입니다 너는 “사랑해”를 모르고 나는 박하향 퍼퓸입니다, 그러나

 

입 하나를 열면 미움이 전이돼요

입 하나를 잠시 벌려도 성질이 전이돼요

입 하나를 임종 직전까지 닫지 않으면 다툼과 경멸로 투병해요

근데요 어머니

숨을 고르지 않아도

눈 두 개가 떠 있으니 살아갈 변명이 없습니다

 

2

 

딱, 한 대만 때리고 싶었던 저녁 열두 시

뼈가 드러난 당신의 팔뚝을 빻아 선물하고 싶었던 열두 시

한 걸음 뗄 때마다 당신의 아래턱을 관통하는 주먹

저녁 열두 시 합정역 도착, 응암행입니다

 

토악질이 업이 되어서야 태어나는 작품

진수 씨 은신처 벽면은 전시장이고

나사를 박아 넣고 목을 매단 우둔한 아이들

고독과 불행으로 축적된 이름들은

신의 보살핌으로부터 첫 절망을 터트린다

 

몸에 선을 긋고 핏덩어리 이마에 손을 얹으며 신은 말한다, 너는 태어난 것부터 죄를 지은 것이니라

그때부터 너와 나의 이름은 배출이다

 

그렇다, 가족들 인간들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 냅다 버리고 싶은데

마법처럼 투시되는 얼굴들

내 생에서 마법 같은 일이 탄생하자

성악설이 범람한다

내 무례한 생을 투기하기 전, 한쪽의 유두를 잘라 최후의 식사를 준비할 때

악력이 거센 인간들이 나를 끌어낸다 네가 네가 네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남은 한쪽의 유두를 소분하기로 하자

가위 바위 주먹을 쥐어 나이프를 쥐자

너의 상냥한 목소리가 심금을 찢는다, 너 이제 예쁜 꿈만 꿔줄래?

 

3

 

시를 쓰자고 했다 돈이 없어서

시를 쓰자고 약속했다

막상 시를 쓴다고 하니 시를 잃어버린다

멍석이 깔리면 천치 광대가 되는 시인이 신발을 잃어버린다

잃은 것을 잡기 위해 오른발을 때린다, 바닥에

돌아선 연유를 잡기 위해 왼발을 때린다

앵무새처럼 낭랑하면서, 낭랑하면 깃털이 자라길 바라면서

으레 융합이라는 토대가 완공되길 바라면서

너무 잘 살면 죽어, 농을 치면서

시를 쓰자고 했다 돈이 없어서

시를 쓰자고 약속했다

 

너와 나는 거리로 나와 바닥을 닦듯이 걸었다 사람들은 섞이고 너의 마음 나의 마음은 썩어가고

여름밤의 숨은 풀풀, 나른하지

 


 

 

정경훈 시인 / 6호선 녹사평

 

 

 8층에서 투신하던 날과 푸른 풀과 무성한 들판과 지하 동굴에서 연지 곤지 찍어 두 사람이 수갑을 차던 날에, 언덕길이 살짝살짝 낮아진다는 항간의 루머가 원자폭탄이 터지듯 피폭피폭 퍼져갔다

 

 무진장 깊은 사람들이 만나면 종이를 꺼내 역사를 짓곤 했다 깊은 만큼 견고한 비밀 속에 손을 넣으며 환희를 적시곤 했는데 피폭피폭 그 어느 날에 남자인 친구는 고환을 잘라 자기 항문에 쑤셔 넣었다는 이야기 자기야 잘 지내, 최대한 멀리서 인사하고 자기야라 부르던 여자인 친구는 혐오에 대한 주장을 하다 엊그제 반혐오자들의 팬티를 철썩철썩 빨았다는 이야기

 

 역사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루머가 나부끼고 미군기지 담벼락에는 개나리 대신 경고장이 피었다 역사 안에는 울다 지친 바람 빠진 풍선의 멜로디가 흐르고 사람들은 나에게 환청이 극심하다 한다 멀고 높은 출구를 보다 크고 많은 틸란드시아를 생각하고 길게 뻗은 줄기를 잡고 오르며 해방을 외치겠다는 생각을 하면 미군들은 내 땅도 아닌 이 땅에서 뭘 지키고 있는 걸까 생각을 한다

 

이제는 그만하고 집에 가야지, 하고 걷던 길

사각팬티 안으로 똥이 떨어진다 나는 습관성이고

타이트한 팬티 덕에 볼기짝은 억압이고 나는 배출성 인간이라

소리를 낼수록 쫄린다

 

이태원과 녹사평 먼 한강진을 하릴없이 걷다가 휴지 한 조각이 가랑이를 뚫고 지나간다

 

휴지를 바랐으나 네가 가고 네가 가고 너도 가고, 시궁창을 가려주던 머리칼 한 줌 잡지 못하고

똥 닦는 이야기나 하고 있다

 

번뇌는 그만해야지 집에 가야지 하지만, 되돌아가는 영상은 흑백영화 필름처럼 끊어지고

여름밤의 숨은 풀풀, 나른하지

 

2021년 《시인시대》신인상 등단시

 

 


 

정경훈 시인

1996년 서울에서 출생.  2021년 《시인시대》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저 말고 모두가 노는 밤입니다』(샘앤파커스), 『아름답고 우아하기 짝이 없는』(시인동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