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순미 시인 / 통영 트렁크 외 1편
손순미 시인 / 통영 트렁크
여관방 문을 여는데 수국이다 간밤 기억 속 탕탕 총성이 저렇게 부풀려진 꽃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총잡이가 되었을 것이다 올망졸망 비좁은 화단에 엉덩이를 까고 앉은 수국에게 누가 저 분홍을 바쳤나 누가 잉크를 쏟아부었나 여름의 입구에 쪼그리고 앉은 수국은 저 혼자 두근두근
어데로 갈까예? 저, 아무 데나 만 원어치만 달려주세요. 택시는 한 마리 생선처럼 헤엄쳐서 대교 근처 여관 앞에다 트렁크를 내던져버린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면 뛰어내리라 뛰어내리라 악마의 농담, 그때 검은 트렁크는 서른 부근
어디에도 은신처란 없는 것이다 어디를 떠나와도 마음이 따라다니니. 소주 몇 잔에도 뱃고동 소리 간간하다 수국이 혼자 젖는다 아무래도 저 수국의 머리는 무게의 천형을 받았구나 나도 쪼그리고 앉았는데 어쩌나 내 머리에도 천 개의 수국이 무겁게 피었어
어디로 가야 할까 저항이든 혁명이든 이 순간을 건너가 보자 한철 아름다움의 명을 받아 무게의 천형을 머리에 이고 가는 저 수국처럼 나는 내가 가진 생의 무게를 건너가야 하리
뽀글뽀글 수국 파마를 한 여자가 여관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다 검은 트렁크는 열려 있다
<시인동네>(2019, 10월)
손순미 시인 / 감자
감자를 삶는다 흐린 불빛 아래 감자를 먹는다 비가 내리고 누군가의 심장 같은 감자가 따뜻하다 일손을 놓고 휴식처럼 감자를 먹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빗소리를 들으며 젓가락으로 포크로 감자의 심장을 푹푹 찌르는 저녁이다 어릴 적 친구 미자 같은 만만한 감자, 나는 자주 감자를 먹는다 그때마다 비가 내렸다 냄비 속에 새알 처럼 담겨진 감자는 순하고 말이 없다 비는 한알 한알 감자의 내부를 파고든다 내가 조용히 않고 있던 슬픔이 저 혼자서 감자를 먹는다 감자는 나를 익히고 내리는 비를 가만히 듣는다 그때 내가 조금 미안했어하며 감자를 삶는다 비는 감자를 익힌다 노란 냄비가 모락모락 익어간다
저것은 감자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