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희 시인 / 크리스마스트리 외 1편
이난희 시인 / 크리스마스트리
젓나무가 한껏 몸을 열어 수백의 유두를 내민다 높은 지붕 위에도 끊임없이 돋아난다 말을
모르는 어린 별들 소리 없이 내려온다 종소리가 퉁퉁 불은 젓나무의 젖샘을 문지르며 수유 시간을 알린다
귤 상자에서, 컨테이너 옆 담벼락에서, 검은 비닐봉지에서, 공중전화 부스에서, 길바닥에서, 쇼핑백에서, 헌옷수거함에서, 공중화장실에서
탯줄에 매달린 울음이 도착할 즈음
깜빡 생각난 듯 젖꼭지를 입에 문 어린 별들 콩나무 줄기 같은 사다리를 오른다
아직 온기가 남은 울음을 쥐고
다시 태어난다
이난희 시인 / 아기 돼지는 그 후
저기 저 언덕 아래 덤불숲으로, 희끗희끗, 연분홍빛 떨어진다, 떨어져 포개진다, 우글우글 미끄러진다, 볏짚보다 단단한, 통나무보다 안전한 벽돌, 아니 창백한 구덩이 아래로
쏟아진다, 갈라진 발톱으로 허공을 할퀸 자국, 멀리서도 낭자하다, 젖꼭지를 놓쳐 버린 아기 돼지 울음소리, 꿀꿀꿀, 굴러떨어진다, 날쌔게 달려오던 늑대보다도 더 날카로운 이빨로, 네 번째 이사를 재촉하는 굴착기 앞에서, 속수무책, 반쯤 넋을 놓고 뚝, 뚝, 뛰어내린다, 이쯤이면 집단 이주도 괜찮겠다고, 꼭 한 번 허공을 날아 볼 심산이었다고,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찰나, 알몸으로 뒤엉켜, 수북하게 쌓여 가는, 꽥꽥 꿈틀거리는, 저 여린 살점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언덕, 수없이 갔다 돌아오는 길에 피어 있던, 샛노란 복수초 한 송이,
하마터면 아름답다, 말할 뻔, 했다
-시집, 『얘얘라는 인형』, 파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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