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시인 / 식사 외 1편
김선미 시인 / 식사
두부에게 오전과 오후를 나눌 필요는 없다 모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어젯밤 뭘 잘못 먹은 남자와 신을 때마다 물집이 잡히는 신발을 신고 소요산행 지하철을 타고 온 내가 같은 약국에서 만났다 감옥은 한때 형무소라고 부르다가 현재 ‘교도소’로 고쳐 쓴다 끓어 넘치면 뚜껑을 열고 조금 더 익힌다 다 끓기 전에 먹으면 양념이 배지 않아 밍밍할 수 있다 엉겨있는 곳은 혼이 많다고 얼굴이 하얀 동기가 말해서 모두 믿는다 끓고 있는 두부를 자를 때 너무 빨리 뜨면 경박해 보이고 노려보지 않으면 불안해 보인다 그 남자는 얼굴이 두부 같았다 할머니는 두부를 자를 때 실로 잘랐다 칼은 필요 없다고 했다 두부를 꼼꼼히 실로 꿰매듯(여기서 두부는 머리가 아님) 모양이 으깨지지 않도록 접시에 가져온다 무너진 더미 속에는 무언가 절박한 것들이 튀어나올 수 있다. 그 남자의 눈 같은 실핏줄이 터진 앞접시에 먹을 만큼 덜어놓고 후후 불면서 먹는다 소리 내고 싶지 않아 꿀꺽 삼킨다 경고를 받은 거야라고 우리 중 누군가 중얼거린다 두부 만들 땐 간수가 필요하다 손가락으로 찌르면 쑥 들어간다
-시집 『마가린 공장으로 가요, 우리』 2017. 포지션
김선미 시인 / 모래가 운다
너의 턱선에서 모래가 묻어난다 나는 너의 턱 만지는 걸 좋아하고
바람이 불면 너의 턱에 새로운 언덕이 생기고
모래가 새처럼 울면
철쭉이 핀다 나는 철쭉의 턱이 어딨는지 몰라 계단이 핀다 나는 계단의 턱이 어딨는지 몰라
밤새 너의 턱선을 부수고 손가락 빨던 습관이 도져와 한낮에도 너의 턱선을 부수고
낙타초를 먹고 입이 찢기도록 구름은 별일이 없고 판도라 상자는 기적처럼 별일이 없고
턱밑 깊은 곳에서부터 바람이 인다
손톱을 물어뜯던 아이가 말을 더듬던 아이가
너의 턱에서 새들을 날려 보내고,
다 자라지 못한 손가락이 백골처럼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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