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해리 시인 / 눈빛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2. 16. 05:00

이해리 시인 / 눈빛

 

 

못다한 말은 눈으로 간다

눈으로 가서 눈빛이 된다

이상하다 눈빛이 슬픈 것들을 지나치지 못한다

사시사철 축축한 주산지 버들의 눈도 그렇지만

불에 봉대를 싸맨 채 배회하는 사슴의 눈,

사슴이 왔다 호박 넝쿨 저 켠에서

연갈색 등허리 털에 흰 눈송이 점점 찍힌 사슴이,

몸은 철망까지만 오고 눈빛은 철망 밖

내 눈 속까지 흘려보내 가슴을 적신다

그 눈빛에서 나오는 슬픈 말을 들으려 귀를 세웠다

아무리 귀 세워도 들을 수 없고

우리 농장에서는 마취제를 안쓴다

주인의 녹용판촉소리만 들려왔다

마취제도 없이 뿔을 자르고 마취제도 없이

마음도 뺏기고 머언 먼 순록의 나라에 내리는

그리움도 빼앗긴 사슴이

철망 하나를 사이로 나를 바라본다

내 눈빛에 사슴은 무엇을 듣는가

서로 바라보며 젖을 뿐 한 마디 말을 못한다

 

-시집 『감잎에 쓰다 』에서

 

 


 

 

이해리 시인 / 텅 빈 아기

 

 

유모차가 간다

목련시장 지나 하나로마트 지나 횡단보도 건너

작고 앙증맞은 바퀴를 돌돌돌 굴리며 간다

햇살이 아기눈동자같이 천진하고 맑은 봄날

유모차 손잡이엔 으레 할머니들이 붙어 있다

손주 태우고 가나 보다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빈 유모차, 아기가 없다

아기 없는 유모차가 간다

텅 빈 아기가 간다

텅 빈 아기 안에 자동차 소음이 한 바구니

하이마트가 틀어 놓은 전파한 바구니

출산은 줄고 고령이 늘어난다 뉴스 한 바구니

노파들은 지팡이 대신 의지하고 가지만

노구를 때 없이 부축하는 저 젖먹이는

등이 무거워 옹알이도 못하고 간다

 

-시집 『감잎에 쓰다』, 시와 사람》에서

 

 


 

이해리 시인

경북 칠곡에서 출생. 1998년 계간 『시대문학』 신인상과 2003년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 시부문 대상으로 당선되었으며 현재 대구시인협회 이사. 민족문학 작가회의 대구지회회원. 시집으로 『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 『감잎에 쓰다』 『미니멀라이프』 『수성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