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미량 시인 / 좌욕 외 1건

파스칼바이런 2022. 12. 17. 05:00

김미량 시인 / 좌욕

 

 

누가 던졌을까

빨갛게 익은 사과 하나

구멍 속으로 쏙 빨려 들어간다

초록 나무 밑을 지나는데 하얀 열매가 톡 톡 터진다

하얀 과즙이 머리로 쏟아져 내린다

칙칙하다 못해 미끈덩하다

발이 제멋대로 놀아난다

태양은 한 시간 내내 바위에다 담뱃재를 털고 있다

회색 정장을 한 박쥐

박하사탕을 물고 날아간다

손으로 재를 털어가며 당신이 자일을 걸고 올라간다

맨발로 성큼성큼 2피치 통과한 뒤 돌아본다

죽은 당신이 살아있다

반가워라

바위에서 내가 당신과 함께 늙어간다

당신이 손을 흔든다

환하게 웃으며 바위를 끌고 사라진다

내 혓바닥에 노란 이끼가 돋는다

갈증이 난다

물줄기에 얼굴을 묻는다

내가 폭포수 아래로 툭 떨어진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물에 빠진 생쥐 한 마리 시계 밖으로

걸어 나온다

참 욕봤다

 

 


 

 

김미량 시인 / 설사, 그녀가

 

 

신호를 보내는 그녀,

그렇게 당부했던, 비밀이 새고 있어요

변비처럼 뭉쳐있던 말들은 한 치의 골몰함 없이 분해됩니다

긴장이 풀리는 순간,

줄줄 흘러나오는 말, 저 참을 수 없는 배설을 누가 좀 말려줘요

설사, 그녀가 나를 배신했다 해도 너무 늦었다는 거 알아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큰소리로 바람의 귓구멍 열던,

오래전 그 사내를 기억해요

숙변처럼 달라붙던 그 사내는

어쩌면 전생에 그녀의 사내였을지 몰라요

오래된 기억을 밀어냅니다

너무 많은 추억을 받아먹고 변기에 앉아있는

탈진한 그녀가 문틈으로 보이네요

밸브 위로 오른손이 얹히고

쉿, 아무 잠시 고요만이 메아리 되어 돌아옵니다

문밖에는 예전의 그녀처럼 내가 서성이고

와르르 하수구를 향해 무너지는, 안개섬모텔이여

그대들이 비웃을 비밀이 흘러 흘러

그녀가 쏟아내는 저 배설은

바다를 향해 바치는 떠끈따끈한 설사

설사 그녀가 나를 떠난다 해도 이젠 붙잡지 않아요

 

[시애] 2010. 여름호

 

 


 

김미량 시인

1970년 대전에서 출생, 2009년 《시인시각(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 <젊은시인들>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