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병일 시인 / 악기 도서관

파스칼바이런 2022. 12. 18. 05:00

이병일 시인 / 악기 도서관

 

 

해 지는 순간에 나가서 해 뜨는 순간에 돌아오는 무역선이 있었다. 어느 섣달 서양악기를 가득 싣고 북해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빗방울이 점점 얼어붙더니 바다와 눈보라는 엇갈린 빙하로 벽을 세웠다. 더 이상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선원들은 악기를 태워 불을 피우자고 했다. 하룻밤 사이 발가락과 손가락이 새까맣게 타오르고 있었다. 가장 차가운 불에 덴 것이다. 오므라들고 오그라드는 얼음구멍 속에서 바다표범이 얼굴을 비추는 밤, 오로라만이 땅거죽을 밀어 올리는 봄을 불러온다고 말했다. 소년은 낮에 본 어떤 악기가 떠올랐던 것이다. 꽁꽁 헝겊으로 감싸놓은 것을 풀어헤치고 침발롬*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신왕에게 바쳐질 악기였지만, 소년은 궁전에 가닿기 전에 얼어 죽을 순 없다고 가느다랗고 질긴 자작 나뭇가지로 선율을 켜기 시작했다. 눈을 꼭 감은 채로 불의 깃털을 가진 음표들이 북극성에 가닿자 별자리가 흐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북두에서 튕겨나간 빛이 빙판에 금을 내자 일각고래 한 무리가 흰빛을 뱉어냈다.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듣지 못했던 음악이 목마른 것에 푸른빛을 내주었다. 흰빛과 붉은빛과 푸른빛이 뱃길 사이로 난 길을 보여주었다. 뼈와 관절 가진 것이 되살아나 한바탕 춤을 추었다. 진물과 피 냄새와 새까맣게 물든 상처가 신들의 땅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새의 부리에서 나오는 휘파람소리가 신들이 주고받은 술잔이었지만 소년은 아직도 무척 추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살갗에 닿는 공기가 한층 부드러워지자 소년은 해가 부지런히 구름떼를 몰아가라고 마지막 악장을 헤고 있었다. 이윽고 소년의 흥과 운명은 뒷문 덜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눈을 뜨자 소년은 해빙 같은 꿈에서 빠져나온 듯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침을 흘리고 있는 거야? 여기가 어디지?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악기 없는 난파선에서 책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빳빳하게 박힌 책의 표지들이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훗날 소리의 뼈가 이곳에서 채굴되었다.

 

*헝가리의 민속악기.

 

계간 『애지』 2022년 여름호 발표

 

 


 

이병일 시인

1981년 전북 진안에서 출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대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 학위. 2005년《평화신문 신춘문예》와 2007년 《문학수첩》신인상 시 당선.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희곡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옆구리의 발견』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나무는 나무를』이 있음. 2014. 수주문학상 시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