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임승유 시인 / 과거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2. 20. 05:00

임승유 시인 / 과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내가 언덕을 오르고 있어서 언덕은 내려갈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몰래 웃을 수도 없었다. 어디 가서 몰래 웃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먼저 가서 언덕이 되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기 싫어서 먼저 안 간 어느 날

 

언덕이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이 캄캄한 적도 있지만 언덕을 보면서 언덕을 오르면

 

언덕은 어디 안 가고 거기 있었다. 한번 언덕이 되면 언덕은 멈출 수 없다. 가다가 멈춘 언덕이라면 언덕은 다 온 것이라고. 잠깐 딴생각을 하다가 언덕을 잊어버린 언덕처럼 앉아 있으면

 

네가 지나갔다.

 

 


 

 

임승유 시인 / 건강하고 안전한 생활

 

 

춥다고 옷을 많이 껴입는 내가 나랑 하겠다고 옷을 벗는다

 

뜬눈으로

 

여름에 불어났다가 가을에 빠지는 개천이랑도

그렇게 했다

 

아버지는 집에 오다가 엄마랑 닮은 여자와 했다

 

구름과도 하고 빈집과도 했다 맞아 죽는 개도 있었고 불쑥불쑥 자라는 애들도 있었다

 

문 열어놓고 하는 집을 지날 때

 

국수나무는 가지 끝이 밑으로 처지며 줄기가 뿌리

부근에서 많이 나와 덤불을 이룬다* 걸쳐진 발목은

문지방을 넘고 또 넘는다 지속되는 몸을 다 통과한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허물은 좋았다

최고로 기분좋게 해주는 사람과는

 

엄마처럼도 하고 엄마랑 닮은 여자처럼도 하고

 

개 패듯 패던 마을 사람들이

 

개천에 모여 살과 살을 섞어 끓이면 후후 불어가

며 천천히 먹었다 아이들이 먹고 가면 노인들이 먹고 가고

 

돌멩이처럼 쪼그리고 앉아 지붕을 적시면 달이 몰려와 둥글고 어두운

망을 보았다.

 

다하고 났을 때

 

구름도 지나가고 아버지도 지나갔다.

 

 


 

임승유 시인

1973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 청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2011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그 밖의 어떤 것>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현대문학상, 김준성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