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일림 시인 / 깊은 침묵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2. 21. 05:00

이일림 시인 / 깊은 침묵

 

 

지구인은 모두 유죄였다

방안에서 세계의 들썩거림을 보는 게

갈수록 쉬워졌다는 신은

사차원 공식을 인포데믹*으로 풀었다

 

죄는 보이지 않고 죄인들만 보여주는 것일까

아무도 묻지 못하는 질문들이 거리에 낙엽처럼 나뒹군다

 

움직이지 마라, 거리를 두어라

죄인에게 침을 뱉지 마라

그리고 묵언하라

 

바이러스 촉수라 부른 꼭대기에는

올라서야 하는 우리의 사명이 타오르고

 

사람들은 무한의 답을 찾기 위해

자연의 질서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싱한 공기만 숨죽여 마신다

 

통신과 매체가 소통의 속삭임을 대신하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뒤란에서 나는 소리가

종종 홍시처럼 붉어지기도 했다

불변의 절대성이 횃불을 끈다

자꾸 되새개게 하는 밤이

깊은 침묵에 휩싸인다

 

- 시인들이 선정한 올해의 좋은 시 중에서-

 

 


 

 

이일림 시인 / 매운 소스

 

 

눈병이 난 거라고 생각했다, 다중적인

 

곰국에 넣을 파를 그냥 다듬고 있을 뿐인데

어머니가 든 회초리는 맴맴 고개 너머 보이질 않는데

사방에 봄소식 그렁그렁 밀려오고 있는데

내 눈을 둘러싸고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양쪽 눈을 실명한 한 사람을 떠올린다

울음은 멀고 깊은 데서 오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그 백지의 거리에서

 

바람의 심장이 흘려보내는 욱신욱신 매서운 물결

눈은 너무 결백한 성정을 가진 것일까

깨끗함이 주는 더러운 슬픔을 만끽하고 싶은 것일까

세상을 볼 수 없어 새하얗던 내 얼린 어는 날에도

눈물이 펑펑 내린 적 있다

 

늦은 겨울이 삼월을 안고 눈을 퍼붓는다

 

-시집 『비의 요일은 지났다』, 이일림

 

 


 

이일림 시인

경남 고성 출생. 부산대 세무회계학과 졸업. 창원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 2008년 <시인동네>로 등단. 시집: <비의 요일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