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민 시인 / 슬픔을 말리다 외 1편
박승민 시인 / 슬픔을 말리다
이 체제下에서는 모두가 난민이다. 진도 수심에 거꾸로 박힌 무덤들을 보면 영해領海조차 거대한 장지葬地같다. 숲속에다가 슬픔을 말릴 1인용 건초창고라도 지어야한다. 갈참나무나 노간주 사이에 통성기도라도 할 나무예배당을 찾아봐야겠다. 神마저도 무한기도는 허락하지만 인간에게 두 발만을 주셨다. 한발씩만 걸어오라고, 그렇게 천천히 걸어오는 동안 싸움을 말리듯 자신을 말리라고 눈물을 말리라고 두 걸음 이상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말린다”와 “말리다” 사이에서 “혼자 울어도 외롭지 않을 방”을 한 평쯤 넓혀야한다. 神은 질문만 허락하시고 끝내 답은 주지 않으신다. 대신에 풍경 하나만을 길 위에 펼쳐놓을 뿐이다.
마을영감님이 한 짐 가득 생을 지고 팔에서 막 빠져나온 뼈 같은 지팡이를 짚고 비탈을 내려가신다. 지팡이가 배의 이물처럼 하늘위로 솟았다가 다시 땅으로 꺼지기를 반복하는 저 단선의 돛. 짐만 몇 번씩 길 밖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길 안으로 돌아와서는 간신히 몸이 된다. 짐이 몸으로 발효하는 사이가 칠순이다. “말린다”에서 “말리다”驛까지 가는데 수없이 내다버린 필생의 결말이 있었던 것이다.
박승민 시인 /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다
메밀밭이 있던 눈밭에서 고라니가 운다. 희미한 비음이 눈보라에 밤새도록 쓸려온다.
나는 자는 척 베개에 목을 괴고 누웠지만 다시 몸을 뒤척여 민물새우처럼 등을 구부려 돌아누워 보지만 눈바람에 실려오는 울음소리가 달팽이관을 자꾸 건드린다. 바람소리와 울음소리가 비벼진 두 소리를 떼어내 보느라 눈알을 말똥거린다.
눈밭에 묻힌 발이 내게 건너오는지 흘러내리는 찬 콧물이 옮겨오는지 머리가 지끈거리고 코가 맹맹하고 팔다리가 자꾸 쑤신다.
어떤 생각만으로도 몸살은 오는지 몸살은 몸속의 한기를 내보내서 몸을 살리라는 뜻인데 나도 모르는 어떤 응달이 아직 살고 있는지 귀를 쫑긋한다.
아내에게는 고라니에게 몸살을 옮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혼자 약 지으러간다.
-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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