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오성일 시인 / 주방보조급구

파스칼바이런 2022. 12. 27. 05:00

오성일 시인 / 주방보조급구

 

 

 십이월 시장통 실비집에서 ‘주방보조급구’를 ‘보조주방급구’로 읽은 밤이 있었다 늘상 주방이 좀 넓었으면 하던 아내의 투정 탓이라고 마른 이마를 긁적였다 남은 술을 비우고 문을 나설 때 작은 손을 앞섶에 닦으며 식당에서 나오는 여인을 보았다 늦도록 설거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주방보조는 밤의 나팔꽃처럼 어깨가 젖어 있었다 변두리로 가는 마을버스가 그녀와, 또 이곳저곳에서 흩어져 나온 밤의 보조들을 거두어 싣고 있었다 밤은 깊을 대로 깊었는데, 지붕 낮은 어느 집에서 그녀를 기다릴 어떤 사내와 그들의 어린아이와, 필시 우리 집 반만쯤 할 그네들의 주방을 떠올리다가, 아무래도 나는 아내의 말에 보조를 맞추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며 막차에 올랐다

 

- 시집 『미풍해장국』(솔출판사 2021)에 수록

 

 


 

오성일 시인

1967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졸업. 2011년《문학의 봄》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외로워서 미안하다』, 『문득, 아픈 고요』 『사이와 간격』 등이 있음. 〈작은 詩앗 채송화〉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