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천 시인 / 맞선 외 1편
최종천 시인 / 맞선
내일 난 누구를 만나기로 되 있죠 나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논길을 걸을 때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도록 홀연히 걷는 겁 많은 여인에 불과하므로 조용히 앉아 그가 펼치는 청사진을 혹은 필름들을 보기만 할 거 랍니다 다만 내게도 소원이 있다면 그가 일종의 견적서 같은 것을 보여주면서 나의 오래된 고독을 우롱하지 않기를 바라죠 물론 나는 사랑도 일종의 사업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사랑에는 한계가 모호하고 사업의 윤곽은 뚜렷하지요 성공하는 남자는 결코 원하지 않을 거 에요 나처럼 수줍은 여인과 무엇을 동업할 수 있겠어요 그래요 고독은 도대체가 무엇의 밑천도 되지 못해요 하지만 나는 늘 고독하기만 한 것은 아니랍니다 때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요리를 하지요 햇살의 커튼으로 창을 장식하고 특히 설거지 할 때는 물을 아끼죠 차를 잘 끓이고 말수가 적답니다 그래요, 비서에나 어울리는 것이죠 내 반짝이는 비늘을 그가 어디에 묻혀 갈지를 모르겠어요
최종천 시인 / 등을 긁다
긁기 제일 좋은 것이 얼굴이다. 벽이야 고양이가 내 대신 긁어줄 것이고 개는 유감없이 전봇대를 알아보고 오줌을 갈길 것이다 나에겐 그들처럼 본능이 없으니 글쎄 등이 가려울 땐 어떡한다? 그때를 위해 다행히도 시집이 있다. 시집은 얇아서 둥글게 말기가 좋다 둥글게 말아서 가려운 등을 긁기 그만인 것이다. 시집은 왜 그렇게나 얇을까? 시집을 주머니에 넣고 이 도시를 방황하자. 다니면서 등이 가려울 땐 가차 없이 도시의 등을 긁어줄 일이다. 도시의 면상을 긁어 줄 일이다 시를 읽고 나서 우수에는 잠기는 것은 시인의 음험한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 된다. 시는 모두 허구이다, 웃기는 것은 상당수의 시인들이 시를 실제로, 실재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를 가장 잘 쓰는 것은 시집을 둥글게 말아서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것이다. 그거야 말로 실재의 시 이다 주머니에 가방에 가볍게 시집을 넣고 다니며 시를 읽자. 가려움을 긁어주자 얼굴이 가렵냐? 왜 인상을 쓰고 그래? 그 얼굴도 시집을 말아서 긁어보라 가려움이 이렇게 시를 원한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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