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채선 시인 / 마른 장마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1. 8. 05:00

채선 시인 / 마른 장마

 

 

기침을 흉내 내며 장난치던 어린애가 앞서 불려가고

쿨럭쿨럭, 때 아닌 감기를 쏟아내고 있던 나는

까까머리 어린애의 병상을 짐작해 본다.

 

타인의 고통을 더듬는 행위는 나의 통증을 깔고 있는 것이어서

철없이 찾아든 병을 철없이 앓는 어린애의

까르르까르르, 민머리 같은 웃음소리를

깨진 유리알을 밟고 내지르는 외마디로 듣는다.

 

검푸른 손목을 뚫고 아이의 몸속을 흘러 다니는 바늘은

어떤 내성耐性일까.

 

죽은 척 멎어 있던 어항 속 금붕어들이

바늘 모양을 한 내 기침을 물고 음찔거린다.

청태 낀 어항 같은 내 몸 속에서

붉고 노란 아이의 심장이 팔딱거린다.

 

마른 날에도 젖는 것들이 있다.

 

까르르르 번져오는 울음, 그 소리를 멈추려고

가느다란 목구멍에 털어 넣는 흰 가루약

포르말린 냄새나는 한여름의 희망이란

아이의 병상기록 같은 것

 

쿨럭쿨럭

어지럽게 바라본 빈 대기실 유리창으로

오래된 안부 같은

마른 장마철 낮달이 슬고 있다

 

 


 

 

채선 시인 / 붉은 오후

 

 

물빛 꽃무늬,

머리 위 양산에서 붉게 번지는 한낮을 쥐고

나는 가네.

 

밟히면 자지러지는

것들 데리고 들어선 미용실.

뜨겁게 피던 꽃무늬 양산을 접고

머리칼을 다듬네.

 

가위손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꽃잎들

타일 위

가늘게 밟히는 것들에게서 들리지

이파리처럼 흩어지는

비명

어두운, 붉은, 참을 수 없이

애증하는 것들

독獨

독篤

독毒

 

거울 속에서 나는,

헐벗네

 

삭발 같은

낮달, 진저리치는

 

 


 

채선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03년 격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시집으로 『삐라』(한국문연, 2013)가 있음. 현재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집장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