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정례 시인 / 발자국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1. 16. 05:00

최정례 시인 / 발자국

 

 

무슨 새의 발자국이 눈 위에 총총총

몇 번 찍고 사라진 흔적 앞에

휘파람새

휘파람새를 본 적도 그 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데

얼떨결에 그 이름 입에 담네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

백지 한가운데 흩뜨려놓다가 한줄기 휘파람따라

사라질 것 같네

 

이 계곡이 숨겨놓은 눈사태보다도

털짐승의 갑작스런 출몰보다도

발밑

얼어붙은 계곡 물의 깊이가 더 무섭네

 

휘황찬 상점의 유리에 비쳤던

순간의 그림자처럼

무슨 짐승이 날개를 친 흔적도 없이

앞뒤없이 백지 위에 발자국만 남겼나

 

엄마, 위인전 읽다가 태어난 연도보다 죽은 연도를

몰라서 물음표가 되어 있으면 그 속으로 빨려드는 거

같애. 예를 들어 장영실(?~?), 이걸 보면 너무 무서워

서 확 넘겨버려. 아이가 말할 때

 

어디선가 휘파람 한줄기 내려오면서 회오리 속으로

머리채를 잡아끄네

 

 


 

 

최정례 시인 / 게들은 구멍 속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갯벌에 꼬물대던 작은 게들이

갑자기

천지개벽의 지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제히 정지한다

 

나는 아무런 의도가 없어, 없어

너희를 잡아 다리를 부러뜨릴 생각도

찜 쪄 먹을 계획도 없다구

 

그래도

꼬물거리던 그들은 내 기척에

기겁을 하고

눈의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뻘 저 편을 바라본다

바라보는 척 게눈을 뜨고 내 눈치를 본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처럼

그들이 내 발길을 피해

일제히 재빠르게 몸을 옮길 때

순간의 무수한 게걸음에

수평선이 빙그르 도는 것 같다

 

아찔하다

하늘은 뻘로 바다는 하늘로 뒤집힌다

 

난 바람을 쐬러 방파제에 서있고

옷자락을 펄럭일 뿐인데

 

섭섭하다

게들이 구멍 속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죽은 척 살아서 내 눈치를 볼 때

 

 


 

최정례 시인(1955~2021)

1955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 『레바논 감정』 『붉은 밭』 등. 등단 30주년에 맞춰 펴낸 『빛그물』까지 모두 일곱 권의 시집을 냄. 오장환문학상, 백석문학상, 현대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이수문학상을 받음. 2020년 혈액질환 발병으로 2021년 1월 16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향년 6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