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비주 시인 / 감꽃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3. 1. 19. 05:00

김비주 시인 / 감꽃

 

 

감꽃이 떨어졌다

우주에서 별이 하나 내려왔다

감꽃 같은 내 사랑 쏟아지는 한 구절

참으로 예뻤다 감꽃처럼 내렸다

감꽃처럼 사라질 어딘가에 드물게

살아있을 그리움 하나

그 그리움 세월 묻고 바람 흔들릴 때마다

감꽃처럼 내려올까 우주의 바람 싣고

별빛 쏟아지는 지구별로

탱탱해진 감정의 한 오라기 감꽃처럼

버티다 한날 바람 한 점에 온 몸을 내줬을까

오늘 떨어진 감꽃처럼 다잡은 마음 억세게

흔들리고 있는 걸까

떨어진 감꽃처럼 왔다 사라져 갈

그리움 하나

 

 


 

 

김비주 시인 / 나무는 비를 감추고

 

 

비 오는 날 걷다 보면

가로수들이 우거진 거리에서는

비들을 작게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무들이 무성할수록 빗방울이 드물게 머리를 지나가고

오랜 생각의 끄트머리엔 늘 무심하게

나무들이 자란다

 

길을 걷다 보면 모든 것들이 말을 걸지만

비 오는 날 속내를 보이며

무성한 나무 아래 서고 싶다

듬성거리는 빗줄기에 살갗을 내주며

나도 나무처럼 차오르고 싶은 걸까

 

무성한 숲에 우거진 나무들은 비를 감추고

사이사이 내리는 울음으로 깨운다는 걸

 

내가 꿈꾸던 언어의 집은

언제쯤 지을 수 있을까

 

 


 

 

김비주 시인 / 배경으로 남고 싶은 날

 

 

검은 빛으로 물들기 직전

회색빛 그라데이션

우울한 하늘은 빛을 버리고

배경으로 내려온다

배경으로 남고 싶은 하루, 바람이 인색하다

산은 안개 속에 싸이고 오늘 하루

배경처럼 낮아지고 싶은 날

모든 사물은 정지

오직 뻐꾸기 소리만

 

난, 길 위에서 번져가는 하늘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 산과 저 산의 끝까지 마음을

거두어 본다

작은 잎 하나 정적을 깨뜨리고

잠시 흔들리다 다시 정지

오늘 난, 배경으로 남고 싶다

 

- 2015년 월간 《문학도시》 12월호 등단시

 

 


 

 

김비주 시인 / 네이버 부동산

 

 

 상처 난 사람처럼 날마다 쳐다본다 네이버 부동산,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내가 살아야할 곳의 간격은 늘 손가락 한 마디로 결정된다 비오고 바람 부는 날이면 날마다 왼쪽 손목 지지대로 사용하는 바람에 어깨가 아리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네이버 부동산에 현재의 나의 집과 미래의 나의 집이 존재한다

 

 존재, 다른 말로 자인(Zine)-스스로를 인정하는- 명명된 개념 속에 나를 가두고 집을 꿈꾼다 미래의 집은 중지를 사용해서 클릭을 해도 현실 같지 않아, 현재 읍에 살고 있는 나를 오래도록 클릭한다 그러다 그러다 네이버 부동산, 언제부터인가 실물들이 자꾸만 오그라들고 거대한 망상 속을 옮겨 다니는 검지 아래 상처를 옮긴다 만국기를 가슴에 달고 질풍노도의 가수처럼 달리다가 그만 턱 숨이 멎었다

 

 영원한 네이버 부동산, 오직 검지로 명명된 나의 집을 오랫동안 클릭했다

 

-시집 『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상상인, 2022) 수록

 

 


 

 

김비주 시인 / 라푼젤

― 거짓 세계의 탈출

 

 

세상 밖을

그리워했어

 

젊음은

우수수 쫃아지는 잠처럼

눈커풀, 무거운 순간을 갈라놓는 것

 

세상엔 마더 고델이,

늘 서성이지만

탑 안의 나는 잊힌 존재

부수고 또 부수어도

아득한 자유

 

유진이여!

어디에나 사다리를 내려

건너게 해주오

머리카락을 잘라서

나를 구할 수 있다면

내 눈물이

나를 구할 수 있다면

 

-시집 『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상상인, 2022) 수록

 

 


 

 

김비주 시인 / 소리 찾기

 

 

드문드문 단풍은 소리를 낸다

구겨진 오후의 햇살을 안고 손 흔들며 넘어지는 소리

전기밥솥의 고무패킹이 소리도 없이 잦아들어

숨을 글글거리다 멋대로 만들어 낸 설익은 밥

떨어지기 전의 것들은 한 번쯤 소리를 냈을까

어제는 아버지의 기일, 덤으로 엄마의 기일을 엎었을 때

소리 내지 않는 난, 출가외인이라고

딸의 손에서 바뀌던 고무패킹,

덧댄 어머니의 버선처럼 오랜 세월 구겨 넣을 소리들

크크크크 숨을 걸러내는 소리가

병동의 수액처럼 누군가의 혈관을 타고

견디어 내는 시간

 

가버린 이들의 헐거워진 시간을 홀로 새기는 날

침묵의 저 끝에 매달린 쓸쓸함

그들의 소리를 찾고 싶다

 

-시집 『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

 

 


 

 

김비주 시인 / 기차로 읽는 풍경

 

 

나지막한 집들은 그림이 되는군요

벼가 살이 차오르기 전 푸른 들은

배경이 되는군요

예전엔 모두가 야트막한 집을 지어

들과 나란히 했지요

한 눈으로 보이는 풍경에 정다운 이야기가

솟아나고요

 

휘둥그레 감탄을 자아내진 않았지요

아파트가 자라고 나의 집도

매일 자라고 있어요

도시의 한가운데로 유목하는 나의 삶은

초록을 지우고 있어요

자꾸만 차오르는 그리움의 발목으로

사막을 건너지요

배경이 되지 못하는 어린 집들은

초원에 있어요

오랜 기다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요

 

 


 

김비주 시인

전남 목포에서 출생.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5년 월간 《문학도시》 12월호로 등단. 시집 『오후 석 점, 바람의 말』(2018), 『봄길, 영화처럼』(2020) 『그해 여름은 모노톤으로』(2022)가 있음. 2018, 2020, 2022 부산문화예술재단 예술창작지원금 시부문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