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구광렬 시인 / 둥근 것들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9. 05:00

구광렬 시인 / 둥근 것들

 

모든 둥근 것들은 제 살을 떼 내주고서야

둥글 수 있었다

둥근 우리 할머니의 미소가 그랬고

우리 살고 있는 지구가 그렇다

아픔은 속으로 삼키고

모가 난 곳은 또 문지르니

어데서 보든 같은 모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밖에선 속 생채기를 전혀 헤아릴 수 없고

아픔은 늘상 과거일 뿐

눈물도 캄캄한 밤에나 떨어지는 것이다

밤새 나뭇잎에 맺혀지는 둥근 이슬이나

밤새 사랑방 둥근 베개가 축축해지는 것이

그보다 더 둥근 것이 흘리는 눈물이요

그보다 더 둥근 이가 흘리는 눈물 때문이란 걸

모나고 뾰족한 마음으로는 통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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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렬 시인 / 쓸쓸함에 관하여

 

고독이 어린 것들의 씨였기에

뱃속에서부터 삶은 쓸쓸한 것이었다

자궁이 꽉 차야 외로움이 덜 했으며

그 덜어진 외로움은 탯줄 너머 고스란히 핏덩이들의 몫이 되었다

그녀의 울음에는 눈물이 없었다

그 마른 울음은 외나무다리처럼 삐꺽대는 탯줄을 건너

너구리 굴 같은 자궁으로 쓸쓸히 울려 퍼졌으며

그 울음은 어느새 그들에겐 고향소리쯤 돼가고 있었다

손가락 수만큼 애들이 나왔다

쓸쓸함을 대물림하지 않으려고 그녀는

사람, 개, 소, 닭이 함께 뒹구는 시장바닥에서 애들을 키웠다

팔을 잡고 다리를 잡고 옷자락을 잡고, 남아 처진 자식들은

씨익 웃으며 다리 밑에서 주웠노라했다

막내가 마악 20년 産 젖을 빨 무렵이었다

남편에게 맞고서도 뒤돌아 웃으며 돈을 세던 그녀

문둥이 손을 거쳤으면 어때, 누가 더럽다했나

오히려 있어 더 외로웠던 남편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웠던 돈.

하지만 이 세상을 쓸쓸한 감옥이라가 했던 그녀에겐

사랑했다던 그 돈마저 쇠창살 밖 재잘대던

한 움큼 햇살보다는 못한 것이었다

 

-시집 『나 기꺼이 막차를 놓치리』에서

 

 


 

구광렬 시인

1956년 대구 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멕시코국립대학에서 중남미문학 전공(문학박사), 멕시코 문예지 '마침표(El Punto)' 및 '마른 잉크(La Tinta Seca)'에 시를, 멕시코국립대학교 출판부에서 시집 '텅 빈 거울(El espejo vacío)'을 출판하고부터 중남미작가가 되었음. 국내에서는 오월문학상 수상과 함께 현대문학에 시 '들꽃'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 시작. 현재 울산대학교 인문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경주 동리목월문예창작대, 대구교대 등지에서 문예창작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