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안효희 시인 / 치유의 방식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9. 05:00

안효희 시인 / 치유의 방식

 

 

저장 강박이 아니다

앤디 워홀이 일생 동안 쌓아 올린

가득한 상자들

 

결코 버릴 수 없는 타임캡슐

내 집에도 가득하다

 

읽지 않는 책, 걸려 있는 옷

알리바이를 증명하듯 탑승권과 입장권

 

흑백사진 속의 구겨진 나날과

먼지처럼 떠다니는 우울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한

수많은 나를 겹겹이 껴안고 살아

 

습자지 위의 붓글씨처럼

지나간 시간이 가장 선명하게 새겨진 몸을 긁는다

 

읽히지 않는 푸코의 책 위로

한 무리 아프리카 얼룩말이 뛰고

프라도 미술관에서 산 파란색 가방 속에서

천 길을 낙하하는 빅토리아폭포 물소리가 들린다

 

터키 괴레메 마을의 기암괴석 은밀한 풍화처럼

시간을 먹고 사는 나의 도구들

 

행복보다 중요한 건 불안하지 않는 것

 

상처를 차곡차곡 외부에 쌓아 곱씹으며

수 천 수 만의 장면과 비명으로

이루어지는 치유의 방식

 

오래도록....

 

하지만 변하지 않는 본질은 없어

모든 것 스스로 내려놓는 날이 올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말없는 시간이

곧...

 


 

 

안효희 시인 / 울음의 주기

 

 

 사는 동안 한바탕 비가 지나갔다 동물원 인공증식장에서 키우던 수 만 마리

개구리가 거짓처럼, 진실처럼 사라졌다 존재는 사라지는 순간 드러나는 것, 어

른들이 작대기를 들고 풀숲을 뒤진다 망각이라는 풀들이 잠시 일어섰다 누울

뿐, 어둠은 아무런 기척이 없다

 

 꼭꼭 숨어라 배꼽 보일라! 꼭꼭 숨어라 울음 보일라!

 

 개구리는 9시뉴스를 타고 전국으로 흩어졌다 쿠쿠 전기밥통 속에서,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 오페라에서, 조각공원 연인의 숲에서 개골개골, 너무 많은 울

음주머니가 열렸다 울음 가득한 오전과 오후, 밤과 낮이 폴짝폴짝 뛴다 저 이불

을 뒤집으면 또 몇 마리나 튀어나올지...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습지가 있다 꼼짝하지 않는 긴발가락개

구리 몇 마리, 흑색 점무늬를 찢고 날개가 돋기 시작한다 달이 뜬다 숨바꼭질은 끝난다 주기적으로 건너오는 울음의 늪이다

 

 


 

안효희 시인

부산에서 출생, 1999년《시와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꽃잎 같은 새벽 네 시』, 『서른여섯 가지 생각』, 『너를 사랑하는 힘』이 있음. 『시와사상』 부주간 역임, 부산작가회의회원, 2017년 제5회 시와사상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