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한영수 시인 / 간이역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11. 05:00

한영수 시인 / 간이역

 

 

여행길에 오르던

그날의 추억속

 

어느 간이역 대합실 창문 밖

풍경을 그려본다.

 

가득한 보랏빛 꽃들

여러 갈래로 뻗은 철길

 

무언가를 알리는

시그널의 불빛들

 

떠나는 열차을아쉬워하는

경적의 여운속 순간

 

어디선가 내게 다가오는

발 걸음이 ...

 

 


 

 

한영수 시인 / 책에게 구걸하다

 

 

지하도 입구

걸인이 책을 읽는다

모자를 벗어 뒤집어놓고

 

점점 코를 박는다

책이 되어 책에게

구걸하고 앉았다

 

책은 뒤통수가 커다랗고

가리키는 것이 많고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해진 외투자락 모래 한 알에서

간밤의 사하라를 읽는다*

다음 문장은 무엇입니까?

 

행인1 걸음이 느려진다

동전 몇 개 모자 속에 떨어진다

행인 2 돌아본다

 

금방 지하에서 나왔는가

들어가기 직전인가

비명인가 가라앉는 돌덩이인가

 

눈으로는 읽을 수 없다

중간만 남아 실금이 많은 책은

 

손으로 두드려서

귀로 들을 수 있고

 

*W. G. 제발트 〈토성의 고리〉

 

 


 

 

한영수 시인 / 다금바리

 

 

 한 마리 잡아 올리면 표정이 풀린다 두 마리 끌어올리면 인생은 네 박자~

십팔번 노래가 절로 나온다 어망을 푼 아내가 웃고 김 씨가 따라 웃는다 이만하면 일당은 했네, 라면에 식은밥을 말다가 작은 놈으로 우럭 정도야 회쳐 아 내 입에도 넣어 주고 제 입에도 넣는

 

 말하자면 다금바리는 천 번을 기운 그물코다 천 번의 바느질 자국이다 김씨가 먹어 보지 못한 것, 바다에 미쳐 공부는 점점 싫어 바다에서 나이를 먹은 김 씨가 사십 년 배를 타면서도 그 속을 모르는 속, 어둡기 전에 거둬 올려야 하는 매일의 어망이다 조수 일을 대신하는 아내의 큰손이다

 

 


 

한영수 시인

1957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 2010년 《서정시학》에 〈시칠리아의 암소〉 외 3편을 발표하며 문단활동 시작. 시집으로 『케냐의 장미』 『꽃의 좌표』 『눈송이에 방을 들였다』 『피어도 되겠습니까』가 있음. 2005년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창작기금 수혜. 2015년 세종문학나눔도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