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일 시인 / 맹수도 퇴근한다 외 2편
강서일 시인 / 맹수도 퇴근한다
동물원의 맹수들도 퇴근을 한다 구경꾼들이 떠나자 그들도 하나 둘 철문으로 사라진다
그곳은 나무들의 뿌리가 하늘로 솟구친 초원이다 먹다 남은 붉은 고기도 걸려 있는 태초의 땅이다
해 뜨면 우리로 출근하고 해 지면 철문 달린 시멘트 집으로 돌아간다 그곳에 밀림의 노을이 진다 자신의 상처를 핥아주던 어미의 부드러운 혀도 있다
문 열리기를 기다리는 저 뒷모습, 생각은 살아 있고 감정은 죽어 있는 너희를 보는 우리들,
어느 동굴에서 달려오는 막차를 기다리며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돌아서는 어둑한 시간, 날벌레가 달라붙는 밤이다
침묵의 뾰족한 조각들이 두 다리를 웅크리게 하는 밤, 피곤한 초침들이 모래밭으로 발을 옮기는 순간이다.
-시집 『고양이 액체설』 2020. 문학아카데미
강서일 시인 / 비밀
또 봄이 왔느냐. 또 꽃은 피었느냐.
홀연히 비밀의 꽃등을 밝힌 문 밖의 모란.
봄은 또 왔느냐. 꽃이 또 피었느냐.
사람들아, 꽃구경 가자.
강서일 시인 / 시나브로
소위 MZ세대나 포노사피엔스는 잘 쓰지 않는 이 말은, 처음에 얼핏 들으면 어느 외국어처럼 들리기도 하고, 시골 할머니들이 주로 사용하는 변방의 방언쯤으로 치부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단어는 아름다운 우리나라 표준말이며, 시인이나 작가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어휘이다. '시나브로'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부사이며 유의어는 '점차, 조금씩, 차차로'가 있다.
이런 시나브로는 내 추억의 한 조각을 단단히 물고 있다. 그것은 살아생전 어머니가 자주 입에 올리시던 말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한꺼번에 급하게 처리하려고 허둥대거나, 얄팍한 꼼수를 지혜로 잘못 알고 행하려는 나를 두고서 어머니는 항상, "야야, 시나브로 해라, 시나브로. 그래야 오래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이 말은 우리 삶의 균형과 방향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저 천천히만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차근차근히 하면서도 확실히 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영어로 말하자면, Slowly but surely인 것이다.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우리말 가운데 하나는, '빨리빨리'라고 한다. 그동안의 우리 사회는 그만큼 속도전이었다. 그 결과, 전후 개발도상국이었다가 선진국으로 편입된 나라는 지구촌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는 사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도 그런 일이 관행처럼 도처에 남아 있어 애먼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1세기 인공지능 정보화 시대에도, 서두를 때가 있고 천천히 돌아볼 때가 있는 법. 저 들판의 그늘진 꽃 한 송이도 저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시나브로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사부작대며 우리를 찾아오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한 걸음씩 올바른 방향으로 꾸준히 힘을 쏟는다면, 우리들의 꿈도 분명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시나브로는 초고속으로 올라가는 마천루의 주춧돌 같은 것이다.
『문학의 집 · 서울』 2022-3월(2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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