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안영선 시인 / 수평으로 걷기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19. 05:00

안영선 시인 / 수평으로 걷기

신발장에서 구겨진 구두 하나를 꺼낸다

낡은 표피를 따라 차곡차곡 쌓인 시절

상흔처럼 누렇게 얼룩져 있다

광택 잃은 거죽엔 우시장에 끌려가던 짐승

그 애절한 울음이 묻어있다

거칠었던 도로의 이면을 따라

내 보폭의 길이를 재던 튼실한 뒷면

낡은 걸음에 휘청대는 날이 잦았던 요즘

서서히 지워지는 이 중년의 걸음에

아내의 반짝이는 구두가

팔짱을 끼듯 기대어있다

때론 익숙한 걸음일수록

밑창을 갈아야 함을 알았다

수선공의 손에 수평 잃은 밑창이 잘려 나가고

기우뚱한 생도 한동안은 반듯할 것이다

교체한 밑창이 만드는 새로운 걸음의 한 보폭

이제 아내가 팔짱을 풀어도

나는 수평의 한 시절을 걷는다

-시집 『춘몽은 더 독한 계절이다』, 천년의 시작, 2020

 

 


 

 

안영선 시인 / 벽을 오르다

화단을 디딘 뿌리는 힘이 없다

검버섯을 피워대는 낡은 무게의 줄기

한때는 뚝 튀어나왔을 힘줄과 근육은

하늘을 향하는 것들에게 다 내어주고

이제 빈손을 털 듯 뒷짐을 지고 있다

나약한 뿌리가 만든 저 무한 생의 흔적

오를수록 싱싱해지는 푸릇한 생장점마다

그 싱싱함의 이면에 딱지처럼 달라붙은 상흔

욕창이 들어 진물이 묻어나는 줄기 하나

지상에 주소를 둔 잎이 벽을 타고 오른다

지붕 끝에서 잠시 주춤거리는 흔들림

수묵으로 다가서는 어둠의 저편에서

저녁놀에 물든 잎은 바람을 따라다니고

물질하던 낡은 뿌리는 휘청대며 자리를 잡는다

먼저 오른 잎은 정상에 깃발을 꽂듯 붉게 물드는데

허공에서 만나는 정점은 저런 것일까

등 굽은 가지가 그림자를 넓히며 지상을 향하듯

시작과 마침은 늘 그 자리에 있다

깃발이 바람의 끝자락을 쥐고 흔든다

정상은 휘청대는 것들이 다시 발길을 내딛는 시작점

만년설은 저만을 위한 허공을 뒤춤에 감추고

더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쫓는 생의 정점도 이러할까

모든 길은 뫼비우스의 띠 속으로 이어져

오르는 길은 내리는 길을 찾아 돌고 도는데

하산을 꿈꾸는 셰르파의 호흡이 저리 편한 것은

목숨의 뿌리를 지상에 둔 까닭

오름의 끝은 지상이다

-시집 <춘몽은 더 독한 계절이다>, 천년의 시작, 2020

 

 


 

안영선 시인

1966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 국민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아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2013년 제1회 《문학의 오늘》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산문집으로 『살아 있는 문학여행 답사기』가 있음. 용인문학회장. 한국작가회의회원.